◈한국문화순례◈/내포문화권

추사를 찾아서 - 예산 월성위 김한신묘

蔥叟 2011. 12. 23. 05:46

 추사를 찾아서 - 예산 월성위 김한신묘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1720~1758)과 화순옹주의 합장묘이다. 합장묘에는 돌담장이 둘러있고 문인석 1쌍, 망주석 1쌍 등의 묘석을 구비하였다. 비문에는 영조의 어필이 새겨져 있다. 묘막은 당초 53칸이었다고 하나 소실되었고, 현재는 초석만이 남아있을 뿐인데 그 부지에 최근 담장을 설치하였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 한 김한신은 벼슬이 수록대부 오위도총관에 이르렀다. 화숨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로서 김한신과 결혼하여 부군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자 식음을 전폐하여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인접한 구릉에 정조가 내린 열려정문이 있고, 추사고택도 같은 구내에 속해 있다. 묘비에는 "有明朝鮮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謚貞孝金公之墓 和順翁主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예로부터 내포지방으로 불린 이곳은 드넓은 예당평야가 있어 쌀이 많이 생산됐으며 지금은 능금(사과)으로 유명세를 더하고 있다. 조선중기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내포(예산)지방을 일러 '산천이 평평하고 전답이 많아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재일 좋은 곳'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경주 김씨인 추사 집안이 예산 땅과 인연을 맺은 것은 15세기 중반 무렵이다. 그의 10대 조부가 서산의 한다리(大橋)마을에 터를 닦은 후 서해안 천수만과 한다리 벌판의 넉넉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집안이 번창해 '한다리 김씨'로 자리를 굳히면서 부터다 이후 추사의 고조부인 김흥경이 영의정에 오르고 영조의 맏딸인 화순옹주를 며느리로 맞이하면서 최고의 가문을 형성케 됐다. 임금의 사위가 된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은 용궁리 일대를 사저로 하사 받아 새로운 명가를 일구게 됐다. 이때부터 추사 집안은 월성김문(月城金門)으로 용궁리에 독립해 오늘의 추사고택의 기초를 이루게 된다. 

 

 

▲김한신묘

 

▲김한신묘

 

▲김한신묘

 

▲김한신묘 묘비

 

▲김한신묘 문인석

 

▲김한신묘 문인석

 

▲김한신묘 장명등

 

  

 

<2011.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