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를 찾아서 - 예산 화순옹주 홍문
조선 영조의 둘째 딸로서, 13세에 영의정 김홍경의 아들 월성위 김한신과 결혼한 화순옹주의 열녀정문이다.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기도 한 김한신은 벼슬이 수록대부 오위도총관에 이르렀다. 추사의 증조할머니가 되는 화순옹주는 38세 때 남편이 먼저 세상을 뜨자 그날부터 식음을 전폐했다. 이 소식이 대궐에 알려지자 부왕인 영조가 친히 거동하여 딸에게 미음을 권했다. 그러자 옹주는 부왕의 간절한 청을 못이겨 미음을 한술 입에 떠 넣었다가는 도로 토해냈다. 임금은 이미 딸아이의 마음을 돌릴 수가 없음을 알고는 슬퍼 탄식하며 궁궐로 돌아갔다. 이 후 옹주는 남편이 죽은 지 14일만에 숨을 거두게 된다.
화순옹녀가 죽자 예조판사는 열녀 정문을 내릴 것을 임금께 고했다. 그러나 영조는 이를 거절했다. '죽은 남편을 뒤따라 굶어 죽었으니 정절은 있으되, 자식으로써 아비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니 효에는 모자람이 있다'는게 그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아비가 자식을 정려(旌閭-열녀문을 내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는 게 두 번째 이유였다. 따라서 지금의 열녀문은 영조 사후 왕위에 오른 정조가 내린 것이다. 약 200여 평의 대지 위에 낮은 담장을 두르고 출입문의 정면에 홍문을 세웠다. 묘막은 정면 8칸, 측면 1칸으로 중앙의 오른쪽 칸에 문을 내었고 문의 정면에 홍살을 세우고 문 위에는 칠을 한 현판이 걸려 있다. 붉은색 현판에 "烈女綏祿大夫月城尉兼五衛都摠府都摠管 贈謚貞孝公金漢藎配和順翁主之門"이라 쓰여져 있다.
▲화순옹주 홍문
▲홍문 전경
▲홍문 전경
▲홍문 건물터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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