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를 찾아서 - 예산 추사고택
내포평야의 얄망얄망한 언덕들이 펼쳐진 용산(龍山·94m) 구릉에 터를 잡은 추사고택은 내포의 특질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풍수전문가들은 ‘추사고택은 문자의 향기(文字香)와 서권의 기운(書卷氣)이 감도는 명당’이라고 말한다. 즉 날카로운 바위산이 보이지 않는 대신 부드러운 언덕이 집터를 에워싸고 있어 문기(文氣)가 무르녹는다는 것이다. 추사고택은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사위가 되면서 하사받은 저택으로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정조 10년 6월3일 아버지 노경(魯敬, 1766~1837)과 어머니 기계 유씨(棋溪 兪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곳이다.
▲추사고택 외경
▲솟을대문
▲사랑채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추사의 영정을 모셔놓은 영실(影室)로 구성돼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고택 풍광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랑채는 ‘ㄱ’자 평면으로 대청을 사이에 두고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직각으로 놓여 있다. 대청 앞 추사가 직접 쓴 글씨로 각자(刻字)한 해시계 ‘석년(石年)’ 위로 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는 고택의 느낌이 더없이 적막하다. 사랑채 앞에는 오래 묵은 모란이 눈길을 끄는 작은 정원이 있고, 그 앞에는 1m 정도 높이의 돌 사각기둥이 있다. 이는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보는 해시계의 한 종류로서 추사가 직접 제작했다 한다. 그 한쪽 면에 ‘석년(石年)’이라 새겨진 글씨는 추사의 글씨. 그러나 직접 쓴 게 아니라 나중에 집자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사랑채
▲사랑채 주초
▲사랑채 뒷면
사랑채 큰방에는 김정희의 대표적인 작품인 세한도(국보 제180호) 복사본도 걸려있으나 무엇보다 추사고택에서 눈에 띄는 건 주련(柱聯)들이다. 서예의 대가 집답게 수많은 주련들이 대문 옆, 현관 앞, 기둥, 바람벽 등에 주저리주저리 걸려 있다. 추사고택에서 천천히 이 주련들만 음미해도 그야말로 문자향과 서권기에 취할 듯하다. 모두가 해동제일의 명필 추사가 남긴 유묵이지만, 이 중에서 안채 정면의 기둥에 걸려 있는 ‘대팽두부과강채 고희부처아녀손(大烹豆腐瓜薑菜 高會夫妻兒女孫)’이라는 예서체 글귀는 유명하다.
▲석년(石年)
▲석년(石年)
▲석년(石年)
해석하면 ‘좋은 반찬은 두부 오이 생강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와의 만남이라’는 뜻. 이는 추사가 과천에 머물던 시절 71세로 세상을 떠나기 두세 달 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명작이다. 떵떵거리던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나 나중에는 온갖 풍파를 겪어온 추사가 인생의 의미는 소박하고 평범한 것에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있다. 또 ‘정좌처 다반향초 묘용시 수류화개(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 水流花開)’라는 글귀도 인기 있다. 그 뜻은 이렇다. ‘고요히 앉은 곳에 차는 반쯤 마셨는데 향기는 처음과 같고, 신묘한 작용이 일어날 때는 물이 흐르고 꽃이 열리는 듯하여라.’
▲안채
▲안채
▲안채
동향인 사랑채 뒤로 남향으로 자리한 안채는 이 지방에서는 드문 ‘ㅁ’자형으로, 양반가의 상징인 6칸 대청을 중앙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을 마주하고 마당을 가로질러 중문을 내었다. 한눈에 언뜻 보아도 대가의 풍모가 넘친다. 안채 높다란 기단 위에 당당하게 자리한 주초와 기둥 그리고 띠살문의 넉넉함, 추녀와 기와의 고색창연함에서 조선 사대부가의 당당한 기품을 본다. 안채 뒤 후원으로 이어지는 추사영실은 추사고택에 제일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추사영실’이라 쓴 현판 글씨는 추사의 지기(知己) 이재(彛齋) 권돈인(權敦寅)이 쓴 것으로 추사의 인품을 보듯 붓끝이 굳세고 힘차다. 조선 양반가의 한 전형이다.
▲안채
▲안채
▲안채
조선 후기의 탁월한 서예가이자 실학자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는 내포지방, 그중에서도 예산이 배출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문에서는 실사구시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를 대성시켜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추사는 서예를 통해 예술의 정수를 널리 떨쳤다. 또 추사는 함흥 황초령에 있는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고석(考釋)하였고, 북한산 비봉에 있는 비석이 이전에 알려진 것처럼 조선 초 무학대사가 세운 것이 아니라 진흥왕 순수비라는 사실을 밝혀냈던 금석학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백파(白坡) 선사와 논쟁을 벌이며 조사선(祖師禪)에 대해 비판을 가할 정도로 불교에도 조예가 깊었다.
▲안채 불발기창
▲안채
▲안채
추사 집안은 16세기 중반부터 가야산 서쪽 해미 한다리(서산군 음암면 대교리)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한 명문. 추사의 증조부인 월성위 김한신(金漢藎·1720-1758) 때부터 해미에서 현재의 자리인 예산 용궁리로 옮겨 살게 된다. 당시 추사 집안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한양 장동에서 살았을 때인데, 천연두가 유행하여 모친이 용궁리로 내려와 추사를 낳았다고 한다.
▲안채 곳간
▲안채 뒷면
▲안채
명문가답게 학문과 벼슬에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충청우도암행어사·성균관대사성·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나중에 잘 풀리지 않았다. 55세인 1840년(헌종 6)에 풍양조씨의 득세로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풀려나왔고,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천(廟遷) 문제로 다시 북청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겨우 풀려났다.
▲추사영실
▲추사영실
▲우물
그럼에도 월성위가 이 고택을 지을 때 충청도의 53군현이 모두 1칸씩 부조하여 53칸짜리 집을 지었다는 일화는 당시 월성위 집안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원래는 정적들이 영조에게 한양 장동에 있던 월성위의 집이 너무 크다고 상소하자 이 집을 뜯어다가 건립한 것이라 한다. 현재 추사고택의 총 면적은 80.5평으로 안채, 사랑채, 문간채, 사당채가 있을 뿐이다. 명문가의 저택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협소하다. 이유는 1968년 추사고택이 다른 사람에게 팔렸는데, 1976년 충청남도에서 지방문화재로 지정하면서 매수하여 복원할 때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버린 왜곡된 건축 형태가 나왔기 때문이라 한다.
▲우물
<2011. 1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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