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을 찾아서 - 경주 백률사(栢栗寺)
신라시대의 성소(聖所)는 어디였을까?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곳이 삼산오악(三山五嶽)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삼산은 나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를 말하는데 구체적으로 현재의 지명은 알 수가 없으나 대체로 나림은 현재의 낭산, 혈례는 청도 지역, 골화는 영천 지방으로 비정된다. 오악은 통일 후에 이루어진 성산을 말하는데 동악은 토함산, 서악은 계룡산, 남악은 지리산, 북악은 태백산, 그리고 중악은 팔공산을 가리킨다.
▲백률사
둘째로 생각할 수 있는 곳은 서라벌 최초의 사찰은 흥륜사와 최초의 비구니 사찰인 영흥사를 비롯한 전불시대칠처가람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전불시대칠처가람은 앞에서 든 천경림의 흥륜사, 둘째는 삼천기의 영흥사, 셋째는 용궁남쪽의 황룡사, 넷째는 용궁북쪽의 분황사, 다섯째는 사천미의 영묘사, 여섯째는 신유림의 천왕사, 일곱째는 서청전의 담엄사를 일컫는데 신라인들의 자부심이 한껏 발휘된 성소이다. 또 하나의 성소를 든다면 바로 신라사회에 불교가 공인되는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인 이차돈을 위해 세운 사찰인 백률사(栢栗寺)이다. 지금 우리는 굴불사를 지나 백률사를 향해 숲길을 오르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 법흥대왕이 자극전에서 정무를 처리할 떼에 동방(扶桑)을 굽어살피고 말하기를, ‘옛날 한나라 명제가 꿈에 감응하여 불교가 동방으로 전파되었는데 과인이 즉위함으로부터 뭇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닦고 죄를 소멸하는 곳을 만들고자 하노라’ 하였다. 여기서 조정 신하들은 아직 그의 깊은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만 나라를 다스리는 대의만 준수하였을 뿐이요, 그가 절을 세우려고 한 신성한 계획을 좇지 않았다. 대왕이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슬프다! 과인이 덕이 없이 왕업을 계승하여 위로는 음양의 조화를 훼손하고 아래로는 뭇 백성들의 환락이 없으므로 만반 정무를 처리하는 여가에 석가의 교화에 뜻을 두었지만 그 누구와 함께 동반할거나!’ 하였다.
▲백률사 대웅전
이때 마음을 닦아 실천에 옮기는 자가 있었다. 그의 성은 박씨요, 자는 염촉(厭髑)이며…중략…당년 22세에 사인(舍人)벼슬에 임명되어 임금의 얼굴을 우러러보기만 하여도 눈치로 사정을 알아맞힐 정도가 되었다. 그가 아뢰기를, ‘제가 들으매 옛날 사람들은 계책을 나무꾼에게도 물었다 합니다. 죄송하오나 하문하신 데에 대하여 여쭙고자 하나이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할 바가 못 된다’ 하니 사인이 ‘나라를 위하여 몸을 희생하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요,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백성의 곧은 의리외다. 그릇되게 말을 전한 죄로 저를 벌하여 머리를 벤다면 만민이 모두 복종하여 감히 지시를 어기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살점이 에이고 몸이 고문당하더라도 한 마리 새를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짐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함이어늘 어찌 무죄한 자를 죽일 것이랴! 너로서는 비록 공덕을 세우는 것이 되지만 죄를 피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인이 대답하여, ‘모든 버리기 어려운 것들 중에도 생명보다 더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만약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 그 이튿날로 위대한 교리가 시행되어 부처님의 해(佛日)가 다시 중천에 뜨게 되고 대왕께서는 길이 편하시리오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봉황의 새끼는 어려서부터 하늘로 솟을 마음을 가지며, 큰 기러기와 고니 새끼는 나면서부터 바다를 횡단할 기세를 품나이 너야말로 이와 같으니 가위 보살(大士)같은 행실이로구나’ 하였다.
▲백률사 이차돈 영정
이에 왕은 일부러 위풍을 차려 바람같은 조두(군용기구)를 동서로 늘이고 서리같은 병장기를 양쪽으로 벌인 후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묻기를, ‘그대들은 내가 절을 지으려고 하는데 어찌하여 주저하고 듣지를 않는가?’ 하니 이에 신하들이 벌벌 떨면서 겁을 내어 정성껏 맹세를 하여 손가락으로 동서를 가리켰다. 왕이 사인을 불러 힐문하니 사인이 깜짝 놀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대왕이 노하여 그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니 관원들이 그를 묶어서 관가에까지 왔다. 사인이 발원을 하고 옥사정이 그의 목을 베니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올랐다. 이때에 하늘이 사방으로 침침해지며 저녁나절 햇빛이 캄캄해지고 땅이 진동하면서 빗방울이 꽃인 양 나부끼며 떨어졌다. 임금은 애통해하면서 구슬픈 눈물로 곤룡포를 적시고 여러 재상들은 근심하여 머리에 쓴 사모에 땀이 흘렀다. 샘물이 갑자기 마르매 어족들이 대궐에서 수레를 함께 타던 벗들은 피눈물 어린 눈으로 마주 쳐다보게 되고, 대궐 뜰에서 같이 놀던 동무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듯 이별을 애석해 하면서 상여를 바라보고 부모가 북은 듯 소리쳐 울었다.
<삼국유사 원종흥법염촉멸신(原宗興法厭髑滅身)조>
하늘로 치솟은 이차돈의 머리가 덜어진 곳에 절을 짓고 자추사(刺楸寺)라고 하였는데 나중에 백률사(栢栗寺)로 이름이 변했다. 신라에서는 음이나 뜻이 같으면 쉽게 이름이 바뀌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자(刺)는 잣이니 백(栢)과 같고 추(楸)는 밤이니 율(栗)과 같은 것이다. 이산의 이름은 금강산인데 금강은 다이아몬드를 말함이다. 다이아몬드는 모든 물건을 자르고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물질이다. 바로 불법으로 신라인들의 무지몽매함을 깨뜨린다는 의미에서 금강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백률사 범종각
이곳에는 이차돈의 무덤이 있었고 그 앞에는 순교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1930년대에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도 불교미술실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옮길 당시에 그 위치를 기록해두지 않아서 구체적인 위치를 현재 알 수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백률사 서쪽에 무덤과 비가 잇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처럼 유물이 그 장소를 잃어버리면 역사성도 함께 잃어버리므로 현장에 있을 때만이 역사적 가치를 온전히 지닐 수 있는 것이다. 이차돈의 머리가 날아가 떨어졌다는 것은 금강산에 그의 무덤이 있음을 빗대어 한 말일 것이다. 현재 대웅전 법당에는 이차돈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신라에는 영험있는 관음보살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신라시대 3대 관음보살로 분황사, 중생사, 그리고 백률사의 관음보살을 꼽는다. 분황사의 관음보살은 희명이란 여인의 아들에게 눈을 뜨게 해주었고, 중생사(衆生寺)의 관음보살은 관음전에 불이 나자 스스로 걸어나왔다고 한다. 백률사의 관음보살도 특히 영험이 많았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그 영험에 관한 설화가 전하고 있다.
▲백률사 범종각편액
천수(天授) 3년 임진(692) 9월 7일에 효소왕(孝昭王)이 대현 살찬(大玄薩湌)의 아들 부례랑을 받들어 화랑으로 만들었더니 화려한 차림을 한 무리들이 1,000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상(安常)과 가장 친하였다. 천수 4년 계사(693) 늦은 봄에 화랑 무리들을 거느리고 금란(金蘭)을 유람하는 길을 떠난 그는 북명(北溟)의 지경에 이르러 오랑캐족 도적들에게 붙들려갔다. 부하들은 모두 두서를 못 차리고 돌아왔으나 안상만은 홀로 그 뒤를 추격하였으니 이때가 바로 3월 11일이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하기를, “선대 임금이 신령한 젓대를 얻어서 이 몸에까지 전하여 지금은 현금(玄琴)과 함께 궁중의 고방에 간직하였는데 국선(國仙)이 무엇 때문에 도적에게 붙잡혔는지 모르겠으니 이를 어쩌면 좋을꼬?” 하였다. 이때에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를 덮었다. 왕이 다시 떨리고 겁이 나서 사람을 시켜 알아보니 고방 속에 있던 가야금과 젓대 두 가지 보물이 없어졌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얼마나 불행하기에 어제는 국선을 잃었는데 또다시 가야금과 젓대를 잃었을꼬!” 하면서 고방 맡은 관리 김정고(金貞高) 등 다섯 사람을 가두었다.
▲백률사 범종
4월에는 국내에 현상모집 하여 “가야금과 젓대를 찾는 자는 한 해 납세를 상으로 주겠다”고 하였다. 5월 15일에 낭의 양친이 백률사 관세음상 앞에 가서 여러 날 저녁을 두고 정성어린 기도를 드렸더니 갑자기 향탁 위에서 가야금과 젓대 두 가지 보물을 얻게 되고 낭과 안상 두 사람은 불상 뒤에 있었다. 낭의 양친이 넘어질 듯이 기뻐하며 돌아오게 된 사연을 물었더니 낭이 대답하였다.
“제가 붙잡혀서부터 그 나라 대도구라(大都仇羅) 집의 짐승 치는 목자가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 들에서 방목을 하는데 돌연히 용모와 거동이 단정한 중 한 명이 나타나 손에 가야금과 젓대를 들고 와서 위로하여 말하기를, ‘고향 생각이 나는가?’ 하기에 저도 모르게 절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임금과 부모가 그리운 생각이야 한량 있사오리까!’라고 하였더니 중이 말하기를, ‘그러면 나를 따라 오라!’ 하면서 저를 데리고 마침내 해변까지 가는데 다시 안상을 만났습니다. 그는 젓대를 툭 치더니 두 쪽으로 나누어 저희에게 주면서 각기 한 쪽 씩 타게 하고 자신은 가야금을 타고 두일 더나가니 잠깐 사이에 이곳까지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백률사 범종 이차돈 순교 조각
이에 자세한 사정을 아뢰었더니 왕이 깜짝 놀라 사람을 시켜 낭을 영접하였다. 낭은 가야금과 젓대를 가지고 대궐로 들어갔다. 왕은 50냥씩 되는 금, 은그릇 다섯 개씩 두벌과 누비 가사 다섯 벌, 비단 3,000필과 밭 1만 경을 절에 시주하여 자비로운 은혜에 보답하였다. 6월 12일에 혜성이 동쪽에 나타나고 17일에는 서쪽에 나타나매 천문 맡은 관리가 아뢰기를, “가야금과 젓대의 상서에 대하여 작위를 봉하지 않은 까닭이외다” 하니 이에 신령한 젓대의 이름을 책명하여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이라 하였더니 그만 혜성이 사라졌다. 그 뒤에도 영험 있는 이적이 많으나 사연이 너무 복잡하여 쓰지 않는다.
<삼국유사 백률사(栢栗寺)조>
백률사의 관음보살입상은 조선시대에 경기도의 어느 사찰로 옮겨졌다가 1700년대 어느 날 모셔진 전각에 불이나 전소되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201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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