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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을 찾아서 - 경주 굴불사터 서면 아미타삼존불입상

蔥叟 2011. 10. 19. 05:15

금강산을 찾아서 - 경주 굴불사터 서면 아미타삼존불입상

  

   굴불사는 신라 제35대 경덕왕이 백률사로 행차했을 때 당속에서 염불소리가 들려 파게 하니 큰 돌에 사면석불이 새겨져 있음을 알고 질을 짓고 굴불사로 하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사찰이다. 그러나 굴불사가 언제 어느시기에 왜 폐사가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통일신라시대의 조각으로 보이는 사면석불만이 제자리에 남아 옛 사찰의 터를 짐작케하고, 불자들의 신앙대상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굴불사터 사면석불

   

▲서면 아미타삼존불입상

 

○경덕왕이 백률사(栢栗寺)로 놀러 가는데 산밑에 닿으니 땅속에서 염불 소리가 나므로 거기를 파게 하여 큰돌을 캐내니 돌 사면에 사방불을 새겼으므로 그곳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굴불(掘佛 : 부처를 파내다)이라 하였더니 지금은 잘못 불러 굴석사(掘石寺)라고 한다.

 

<삼국유사 사불산, 굴불산, 만불산(四佛山,掘佛山,萬佛山)조>

 

   이 기록에 근거하여 사면석불 조성연대의 하한을 경덕왕대로 추측할 수 있다. 기록대로 라면 이 불상은 750년대 경덕왕시대의 작품이다. 그러나 조각기법에 근거해 보면 당시의 작품이 될 수 없다. 강우방은 이 작품이 8세기 경덕왕 때의 작품이라면 우리 나라 불상 조각사를 다시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론적으로 전체적인 조각양식은 경덕왕대인 742~765년 사이나 그보다 약간 올라가는 시기에 조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면 아미타삼존불입상

   

▲서면 아미타삼존불입상

  

   굴불사터는 1985년 실시된 발굴조사에 의하면불상의 전체 모습을 알게 되었고 사면석불을 중심으로 조영되었던 정면 1칸, 측면 3칸의 법당터가 확인되었다. 신라, 고려시대의 기와가 출토되었고, 그 중에는 ‘掘石寺’ ‘東寺’라는 명문도 나왔는데 1238년 이후의 기와는 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조선시대의 기와도 수습됨으로서 이 건물은 조선중엽에 이르기까지 목조기와를 한 건물이 존재하였음이 밝혀졌다. 따라서 삼국유사의 기록과 같이 굴불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때 창건되어 신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존소한 것으로 보여지며 고려시대에는 한때 사명이 동사로 불리워졌을 가능성이 있고 고려 명종때인 1183년 한차례의 불사가 이루어졌고 이때의 사명은 굴석사였으며 굴석사의 이름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시기인 1280년대까지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면 아미타삼존불입상

  

▲본존 아미타여래입상

 

   그리고 1238년 몽고가 침입하여 황룡사가 불타던 그때에 굴불사도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그때 스님들이 중요한 것들을 땅 속에 묻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조선시대 숙종때인 1681년에 다시 불사가 이루어진 후 100년가량 법등이 이어졌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후 폐사가 되었고, 사면불은 자연적으로 매몰되고 겨우 머리 부분만이 노출되어 있던 것을 1900년대 일본인들이 발굴한 결과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각 면의 불상·보살상은 사방정토(四方淨土)에 있는 대표적인 상들을 나타낸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 불상은 균형있는 신체비례와 자연스러운 자세를 보여주는데, 대체로 719년명이 있는 감산사(甘山寺) 불상·보살상보다 진전된 조각양식을 나타내고 있어 〈삼국유사〉에 보이는 경덕왕대의 연대와 부합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석굴암의 불상군보다는 앞선 8세기 중엽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불교경전이나 불비상(佛碑像)에 나타나는 사방불의 명칭은 매우 다양한데, 굴불사 사방불의 구성은 어느 한 경전에 의거했다기 보다는 당시 신라에서 널리 신앙되었던 불상들을 각 면에 배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불 상반신

 

▲본존불 상호

 

   사면석불의 상들은 크기가 다양한데 서면(西面)의 아미타삼존불(阿彌陀三尊佛)이 가장 크다. 본존상은 고부조로 새겼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올렸다. 양협시보살상은 다른 돌에 환조(丸彫)해 세웠는데, 왼쪽 보살상의 보관에 화불(化佛)이 있고 정병을 들고 있어 관음보살(觀音菩薩)임을 알 수 있다. 서면은 서방극락정토의 아미타삼존불로 보인다. 좌협시보살이 왼손에 정병을 들고 보관에는 화불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관세음보살로 추정되며, 우협시보살은 대세지보살로 추정된다. 본존인 아미타불은 머리를 별석(別石)으로 만들어 얹었는데 이같은 양식의 첫 번째 사례로써 남산의 약수계 마애대불이나 고려시대의 야외에 만들어지는 대부분의 대불이 이 양식을 이어서 머리를 별석으로 만들어 얹었다. 안동의 제비원 마애불이나 경기도 파주의 용미리 마애불 등이 대표적인 것이다.

 

▲좌협시보살

 

▲좌협시보살 상호

 

   왼쪽 보살의 한쪽다리에 무게중심을 두고 균형을 잡는 삼굴자세(三屈姿勢)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삼국시대말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통일신라시대에 와서는 더욱 유행하는 양식이다. 이러한 삼굴자세의 원류는 인도 굽타시대의 불상에서 부터 보이나 그 양식은 중국의 수나라와 당나라를 거쳐서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이다.

 

▲우협시보살

 

 

 

<2011. 8.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