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을 찾아서 - 경주 전도량사터 마애지장보살상
금강산 동남쪽 도로변에 마애보살상이 있다. 1979년경에 길을 보수하던 중에 발견되었다. 마애보살상은 자연 암벽의 남면을 이용하여 조각하였는데 보살상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제작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거친 정자국을 그대로 남겨 놓았다. 옷무늬, 안면부, 수인 등이 명확하지 않은 이 보살상의 가장 큰 특징은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다는 점이다. 머리에 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로 여겨지는데 낭산 마애삼존불의 지장보살이 삼존불의 형식을 하고 있는데 비하여 이곳은 독존이다. 조성연대는 신라말 고려초로 보고 있다. 노출된 보살상의 크기는 너비 56cm, 높이 62cm이다.
▲마애지장보살상
지장보살은 사찰의 명부전에 모셔진 파란 까까머리에 두건을 쓴 보살인데 사후 지옥에 간 사람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보살이다.
한 바라문 집안에 18세 된 어여쁜 소녀가 살았다. 그녀는 깊고 두터운 복을 심어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소녀의 아버지는 시라선견(尸羅善見)이라는 분이었는데 불교에 대한 믿음이 두터워 삼보(三寶:佛․法․僧)를 철저히 공경하고, 계율과 선정(禪定)과 지혜의 삼학(三學)을 부지런히 닦다가, 수명이 다하여 천상(天上)에 태어났다.
그러나 소녀의 어머니 열제리(悅帝利)부인은 그렇지 않았다. 삿되고 방탕한 생활에 빠져 인과(因果)의 이치를 믿지 않고 불교에 대한 비방도 삼가지 않았다. 열제리 부인은 술에 취해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갑자기 혈관이 터지고 전신의 골절이 꼬여드는 고통에 빠져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어머니마저 잃은 슬픔과 외로움이 뼈 속 깊이 사무쳐 흐느껴 울던 소녀의 머리 속으로, 불현듯 한 생각이 꿰뚫고 지나갔다.
“어머니의 혼령(魂靈)은 어느 곳에 태어났을까?”
평소 바른 삶과 바른 신앙과는 거리가 먼 분이셨으니 결코 좋은 세상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리라는 생각이 들자 소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소녀는 부모님이 남긴 모든 재산을 팔아 어머니를 위한 재(齋)를 올리기로 하였다. 꽃과 향, 여러 가지 의복과 음식과 탕약을 마련하여 각화정자재왕여래(覺華定自在王如來)가 계신 절을 찾아 길을 나섰다.
그러나 그날 따라 길거리에는 수많은 걸인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아픔의 신음을 토해내는 자도 있었다. 맑은 소녀의 마음에는 그들의 고통이 그대로 비춰지고 있었다.
‘중생공양(衆生供養)이 제불공양(諸佛供養)이라 하셨으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생각하며 소녀는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을 주고, 추위에 떠는 사람에게는 옷을, 병고에 시달리는 자에게는 약을 주며 위로하였다. 그러나 길은 멀고 사람은 많았다.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마련한 음식과 옷과 약이었지만 어느덧 바닥을 보이고 말았다. 소녀는 마침내 입고 있던 옷까지도 모두 벗어주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다.
소녀는 어느 구덩이 속에 들어가 벗은 몸을 가리고, 유일하게 남은 향을 사르고 꽃을 흩으며 기도하였다.
“각화정자재왕여래이시여, 이제 소녀는 더 이상은 감히 부처님 앞에 나아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중생을 어여삐 여기시고 구제할 자를 구제하여 저의 조그마한 정업(淨業)을 헛되지 않게 하옵소서. 어머니의 혼령을 위해 자비를 베푸시고, 그 태어난 곳을 알게 하여 소녀의 괴로움을 그치게 하여 주옵소서”
그 순간 부처님은 소녀의 앞에 나타나 말씀하셨다.
“착하다, 성녀여. 18세 처녀의 몸으로 옷을 벗어 걸인에게 주고 벗은 몸을 흙 속에 갈무리하였으니 누가 너를 보살(菩薩)이라 하지 않겠느냐! 내 너의 공양을 달게 받고 너의 소망을 성취시켜 주리라.”
이때부터 성녀는 지장보살(地藏菩薩:땅 속에 몸을 갈무리한 보살)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 뒤 소녀는 각화정자재왕여래의 인도로 지옥이 있다는 대철위산 서쪽의 ‘중해(重海)’라는 바닷가에 이르게 되고, 그곳에서 지옥에 떨어져 고통받는 중생의 모습과 지옥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아울러 소녀의 공덕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각화정자재왕여래가 3일 전 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오셔서 어머니뿐만 아니라 함께 고통받던 죄인들을 모두 구제하여 하늘 나라에 태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옥에서 나옴 소녀는 다시 각화정자재왕여래에게 나아가 원을 세운다.
“맹세하오니 저는 미래의 시간이 다할 때까지 죄고(罪苦)에 빠진 중생이 있으면 마땅히 널리 방편을 베풀어서 해탈케 하오리다.”
“맹세하오니 죄고를 받는 육도중생(六道衆生) 모두를 해탈케 한 다음, 저는 성불(成佛)할 것이옵니다.”
이 분이 명부전의 본존(本尊)인 지장보살이다.
▲마애지장보살상
한편 이곳은 『삼국유사』권제4 의해 제5 사복불언(蛇福不言條)에 나오는 도량사로 추정된다. 사복불언조에 의하면 금강산 동남족에 도량사라는 절을 창건하였다는기록이 나오는데 이 절터가 금강산의 동남쪽이며 주변에 다른 절터가 발견되지 않는 점으로 미루어 도량사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서울 만선북리에 한 과부가 있었다. 그녀는 남편도 없이 아이를 배어 낳았는데 그 아이는 나이 12세가 되도록 말도 하지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그 때문에 사동-아래에서는 혹 사복이라고도 하고, 또 사파, 사복이라고 썼다. 이것은 모두 사동의 이름이다-이라 불렀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죽었다. 그 때 원효가 고선사에 있었는데 사복이 찾아왔다. 원효는 그를 보고 맞아 예를 했으나 사복은 답례도 없이 말했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지금 죽었으니 나와 함께 장사지냄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고 하고 같이 사복의 집으로 갔다. 여기에서 사복은 원효에게 포살(布薩-불교의식의 하나로 출가한 이에게 중들이 보름마다 모여서 戒經을 들려주고 죄를 참회시켜 선을 기르고 악을 없애는 일)시켜 계를 주게 하니, 원효는 그 시체 앞에서 빌었다. "세상에 나지 말 것이다. 그 죽는 것이 괴로움이라. 죽지 말 것이니라. 세상에 나는 것이 괴로우니라."
사복이 너무 길어 번거롭다고 하자 원효가 고쳐 말했다. "죽는 것도 사는 것도 괴로움이로다." 그리고 두 사람은 상여를 메고 활리산 동쪽 기슭으로 갔다. 원효가 말했다. "지혜 있는 범을 지혜의 숲 속에 장사지냄이 또한 마땅하지 않은가." 사복은 이에 게(偈)를 지어 읊었다.
그 옛날 석가모니불께서는
사라수 사이에 열반하셨네.
그 같은 이 지금 또 있어
연화장 세계로 들려고 하네.
읊기를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한 세계가 있었고, 칠보로 장식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한데 아마 인간의 세계는 아닌 것 같았다. 사복이 시체를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가자 문득 땅이 합쳐졌다. 이것을 보고 원효는 혼자 돌아왔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금강산의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라 했다. 해마다 3월 14일이 되면 점찰회(占察會-점찰경에 의한 법회)를 여는 것을 항규(恒規)로 삼았다. 사복이 세상에 영검을 나타낸 것은 오직 이것뿐인데, 세간에서는 황당한 얘기를 덧붙였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삼국유사 사복불언(蛇福不言)조>
▲마애지장보살상
<2011.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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