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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가는 길 - 중국 단동 박작성

蔥叟 2011. 8. 26. 00:24

고구려 가는 길 - 중국 단동 박작성

  

   고구려 가는 길 첫 걸음부터 중국의 역사왜곡 사업인 동북공정의 현장을 만난다. 단동에서 약 30km 가량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고구려의 박작성(泊灼城)으로 추정되는 성곽이 나타난다. 박작성의 축조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가 압록강 하구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차지한 것이 3세기경이다. 그런데 서안평현성은 현재의 애하첨고성이고, 박작성인 호산산성의 축조는 후대일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 하구에 위치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길목을 통제하는 요충성이다. 이 성은 애하와 압록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돌출된 독립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다. 최고봉은 146m이고 성 안에서 둘레 4.4m, 깊이 11.25m에 달하는 고구려 시대 우물이 발견되었다. 우물의 석축벽은 모두 잘 다듬은 쐐기꼴 돌을 곧게 올려 쌓았는데 아직까지도 53층이나 남아 있다. 전형적인 고구려 축성법을 이용한 성으로 알려졌다. 성곽의 축조 지형으로 단동쪽 서쪽방향을 방어하기 위해 호산의 서쪽 지형으로 축성되어 있었다. 박작성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다음과 같이 등장한다.

 

▲박작성

 

▲호산장성 알림판

  

○七年, 九月, 群獐渡河西走, 群狼向西行, 三日不絶. <太宗>遣將軍<薛萬徹>等來伐. 渡海入<鴨淥>, 至<泊灼城>南四十里, 止營. <泊灼>城主<所夫孫>, 帥步騎萬餘, 拒之, <萬徹>遣右衛將軍<裴行方>, 領步卒及諸軍乘之, 我兵潰. <行方>等進兵圍之, <泊灼城>因山設險, 阻<鴨淥水>以爲固, 攻之不拔. 我將<高文>, 率<烏骨>, <安地>諸城兵三萬餘人, 來援, 分置兩陣, <萬徹>分軍以當之, 我軍敗潰.  

7년 9월, (당)태종이 장군 설 만철 등으로 하여금 우리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서, 박작성 남쪽 40리 지점에 진을 쳤다. 박작 성주 소부손이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방어하였다. 만철이 우위 장군 배 행방으로 하여금 보병과 모든 군사를 거느리고 이들을 공격케 하자 우리 군사가 무너졌다. 배 행방 등이 진격하여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을 이용한 험준한 요새였으며, 압록강으로 튼튼하게 막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 문이 오골성, 안지성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두 진으로 나누어 구원하였다. 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여, 우리 군사가 패배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그런데 1990년대에 중국에서 중국성 형태의 성곽으로 동녘을 방어할 수 있도록 새로 축조한 후 지금은 만리장성의 동단이라 주장하고 있다. 다만 성안에 고구려의 옛 우물 유적지가 남아있는 것은 중국측도 인정하고 있다. 중국 측에서는 약 500여년전 명 성화 5년(明 成化五年, 1469)에 세워 졌으며, 명대 만리장성의 최동단 기점으로 확인 되었다고 주장한다. 한면은 산으로 삼면은 강으로 둘러 싸여 있고 산 형세가 마치 누워있는 호랑이 모습과 같다 하여 호산장성(虎山長城)이라 불리어 진다고 한다. 이같은 중국측의 억지 주장에 대하여 소설가이자 역사연구가 황원갑은 다음과 같이 실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중국의 역사왜곡과 탈취기도가 집요하다. 고구려· 발해사 왜곡도 모자라 이제는 고조선· 부여사까지 중국사에편입시키려 하고 있다. 동북아 고대문명 전체를 중국사의 일부로 둔갑시키려는 것이다. 중국 국가문물국과 국가측량국은 지난 2009년 4월에 '만리장성'의 길이가 종전의 6,300km보다 훨씬 더 긴 8,851.8km라고 발표했다. 그동안 만리장성은 동쪽의 허베이성(河北省) 친황다오시(秦皇島市)의 산해관(山海關)에서 서쪽으로 간쑤성(甘肅省) 가욕관(嘉欲關)까지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다.

 

▲박작성

  

▲박작성

 

   그런데 최근 중국은 이런 통설을 뒤집고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산해관이 아니라, 압록강 하구인 랴오닝성(遼寧省) 단둥시(丹東市) 북쪽 호산(虎山)이라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허위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국은 이미 지난 2004년에 단둥시 호산에 거대한 규모의 호산장성을 만들어 놓고 이를 ‘만리장성 동단기점’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호산산성은 고구려의 대 중국 방어거점의 하나인 박작성(泊灼城)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중국은 호산산성을 만리장성의 기점으로 만들기 위해 산성을 증축하고, 역사박물관을 신축하면서 기존의 고구려시대 박작성 유적을 대거 훼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중국 어용학자들의 역사왜곡과 날조에 따라 제멋대로 늘어나는 만리장성은 고무줄 장성인가? 중국이 만리장성을 압록강 하구까지 연장하려는 저의는 결국 고조선· 부여·고 구려· 발해의 영토였던 요서· 요동· 만주가 모두 중국의 영토였고, 이 땅에 세워졌던 나라는 모두가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이란 궤변에 다름 아니다.

 

   중국은 이와 더불어 랴오닝성 주도로 ‘랴오허(遼河) 문명설’을, 지린성(吉林省) 주도로 ‘창바이산(長白山)문명론’을 내세워 ‘중국 문명은 황허(黃河)문명뿐 아니라, 요하 유역의 동북문명이 합쳐진 것’이라는 해괴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요하와 발해만 유역, 만주는 고조선 문명의 발상지요, 한국사의 요람이었다. 고조선에 이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차례로 일어난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였다. 중국이 황당무계한 역사왜곡과 날조를 자행하는 근본 원인은 중국사의 뿌리가 한국사보다도 짧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안 중국사의 시원(始原)은 황허문명설이 주류로 자리잡아 왔었다.

 

▲호산장성

 

▲박작성

 

   그러나 지난 80년대부터 요하· 발해만 유역에서 기원전 7000~1500년의 신석기· 청동기 유적이 대거 발굴되었는데, 빗살무늬토기· 비파형청동검 등 한국 고대사의 대표적 특징인 유물· 유적이 대거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측이 위기를 느낀 것은 기원전 1700~1100년대의 은허(殷墟) 유적 유물보다 훨씬 오래 전의 갑골문(甲骨文)이 바로이 지역에서 출토된 사실이다. 이는 고조선의 발해만· 요하문명이 중국의 황허문명보다 앞섰다는 움직일 수 없는 방증이 되기 때문이다.

 

   ‘소수민족의 지방정권설’만 해도 그렇다. 고구려가 과연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던 지방정권이었을까. 고구려는 BC 37년 건국부터 668년 망국까지 28왕 705년을 유지했다. 그동안 중국에는 후한부터 당까지 무려 33개 나라가 명멸했는데, 200년 이상 지탱한 나라는 단 하나도 없었다. 가장 오래 간 나라가 196년을 유지한 후한이요, 그 다음이 103년인 동진이다. 심지어는‘황제’가 1명 뿐인 동위나,겨우 7년 만에 망한 후량 같은 하루살이 제국도 수두룩했다. 중국 역사상 가장 많은 영웅호걸이 등장했다는 삼국시대도 위· 오· 촉 3국의 임금이 모두 11명에 60년밖에 가지 못했다. 또 신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도 20대 290년을 이어갔을 뿐이다. 당나라에 앞서 중국을 재통일하고 4차에 걸쳐서 고구려를 정복하려다가 패한 수나라는 겨우 3대 38년만에 망했다. 고구려가 ‘속국’으로 있던 705년 동안 중국에선 33개 나라의 흥망이 무상했으니, 이처럼 어처구니없는 ‘본국’이 어찌 있단 말인가.

 

   사실(史實)이 이러함에도 중국은 입만 열면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궤변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중국이 이처럼 역사왜곡· 날조와 탈취에 집착하는 데에는 더큰 이유가 있는 듯하다. 중국사를 돌이켜볼 때 중국 민족의 주류인 한족(漢族)의 역사는 별 볼일 없었기 때문이다. 한족이 세운 나라는 진과 한, 그리고 동진이후 송과 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중국이 자기 땅에 있던 나라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라고 강변하는데 우리라고 해서 중국사의 뿌리는 고조선사라고 당당히 주장하지 못할 것도 없다.

 

   고조선의 발해만· 요하문명이야 말로 황허문명보다 1000년이나 앞선 고대문명이 아닌가. 중국의 역사왜곡과 날조의 밑바닥에는 중화제국주의 부활과 역사 패권주의가 자리잡고 있으므로 경계심을 늦춰서는 안되겠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 우리가 중국과의 역사전쟁에서 계속 밀리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교육을 강화하는 길밖에는 없다.

 

<황원갑, 월간 '대한언론'>

 

▲박작성에서는 압록강 건너 북한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있다

 

 

 

<2011.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