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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발상지 - 중국 환인 미창구 장군묘

蔥叟 2011. 8. 27. 02:34

고구려 발상지 - 중국 환인 미창구 장군묘

 

   단동에서 환인의 미창구 장군묘를 찾아가는 길은 멀다. 때로는 비포장길도 달려야 한다. 관광기사마저도 길을 잘 찾지 못하고 가던 길을 되돌아오기도 하며 겨우 찾아갔다. 미창구(米仓沟)는 중국 요녕성 환인만족자치현 아하향 미창구촌인데 아마도 이곳이 쌀을 많이 생산하는 지역이므로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환인의 미창구장군묘는 1991년 9월 발견, 조사되었다. 외형이 절두방추형인 이 흙무지돌방무덤의 흙무지 둘레는 150m에 이르며, 바닥부터의 높이는 8m 가량이다. 널길과 두 개의 퇴화형 곁방, 이음길, 널방으로 이루어진 외방무덤으로 잘 다듬은 장방형 석재로 널방의 벽과 천장을 쌓았다. 눈길을 끄는 것은 널방 네 벽 위쪽에 일정한 간격으로 20군데에 걸쳐 뚫려 있는 못구멍이다. 동벽의 못구멍 2개에 구리못의 일부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널방에는 만장이 걸려 있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무덤주인부부의 장례 당시 곁방과 널방 안은 장식무늬로 채워지고, 널방 네 벽은 만장으로 둘려졌으며 널방 안에는 두 기의 돌관대가 나란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무덤의 규모, 무덤축조에 사용된 장대한 석재, 무덤칸 내부를 장식한 벽화의 제재와 구성방식이다.

 

 

 

 

 

▲장군묘

 

▲장군묘

 

▲장군묘 

 

   벽화를 먼저 살펴보자. 장군묘, 미창구1호묘 등으로도 불리는 이 무덤의 내부는 연꽃문과 ‘王’자문 중심의 장식무늬로 채워졌다. 앞방의 퇴화형으로 볼 수 있는 두 곁방 안은 온통 ‘王’자문으로 장식되었고, 널방은 벽과 천장고임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된 측면연꽃으로 채워졌다. 4단 평행고임 밑면에는 곁방에서와 같은 ‘王’자문이 묘사되었으며, 벽과 천장고임의 경계에 가로로 길게 띠를 이루도록 그려진 자색 대 안에는 변형용문을 그려 넣었다. 비교적 넓은 천정석 밑면에는 옥벽(玉璧)처럼 바깥은 둥글고 안쪽은 네모진 무늬 9개가 열과 행을 이루며 그려졌다.

 

   잎맥과 꽃술까지 표현되고 꽃잎 끝이 뾰족하게 처리된 측면연꽃은 5세기 중엽을 전후한 시기에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즐겨 선택되었다. 산연화총이나 장천2호분과 같은 연꽃장식 벽화고분의 중심제재였다. ‘王’자문 역시 같은 시기 집안지역 고분벽화의 제재로 선호되었다. 산성하332호분은 널방 벽면 전체를 ‘王’자문으로 채우고, 천장고임은 연꽃으로 장식한 사례이고, 장천2호분은 장군묘처럼 두 개의 곁방은 ‘王’자문으로 장식하고 널방은 연꽃으로 채운 경우에 해당한다. 미창구장군묘는 연꽃무늬와 ‘王’자문이 유행하던 5세기 중엽 전후 집안지역 벽화고분의 일반적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벽화고분인 셈이다.

 

▲장군묘

 

▲장군묘

 

▲장군묘 내부모형

 

   장군묘는 외형도 크지만 무덤칸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널길의 길이가 5.4m, 안쪽 너비가 1.48m이며, 왼쪽 곁방의 길이X너비X높이가 1.6mX1.17mX1.34m, 오른쪽 곁방이 1.58mX1.16mX1.34m, 널방이 3.52mX3.50mX3.5m이다. 널방 크기로 볼 때 북한에서 왕실귀족의 무덤으로 거론되는 진파리4호분이나 왕릉급 무덤으로 평가되는 호남리사신총에 비해 결코 작지 않다. 더욱이 이 무덤을 축조하는 데에 사용된 석재 가운데에는 길이가 3m, 두께가 1m에 이르거나 이보다 큰 것도 여럿 확인된다.

 

   미창구 장군무덤이 환인지역에서 발견된 가장 큰 규모의 무덤인데다가 내부가 화려한 장식문양이 그려진 고분벽화로 밝혀지면서 과연 이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가 논의가 분분하다. 중국에서는 이름처럼 이 무덤이 왕릉이 아니고 특수한 신분의 귀족무덤이라고 주장한다. 논거로는 이 고분에서 발견되는 고분벽화가 약 4~5세기의 양식이므로 이 때는 호태왕과 장수왕의 시기이므로 이 지역에 왕릉이 조성될 리 없다는 것이다. 그런 견해들 중에서 주목받았던 주장이 발기 후예의 무덤일 것이란 견해였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살펴보자.

 

▲장군묘 표석

 

▲장군묘 봉분 정상

 

 

 

   고국천왕[혹은 국양이라고도 한다.]의 이름은 남무[혹은 이이모라고도 한다.]이며, 신대왕 백고의 둘째 아들이다. 예전에 백고가 죽었을 때, 백성들이 왕의 맏아들 발기가 어질지 못하다 하여 이이모를 추대하여 왕을 삼았다. 한 헌제 건안 초기에 발기가 형임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소노가와 함께 각각 민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동 태수 공손 강에게 가서 항복하고, 비류수가로 돌아와 살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이 기록에 의거하여 발기가 이곳에 살다 죽은 이후 200여년이 지난 어느 후예가 주인인 무덤이 곧 장군무덤이란 주장이다. 신대왕의 아들 중에는 발기라는 이름을 가진 형제가 두 명이다. 신대왕의 맏아들 이름이 '발기(拔奇)'이고, 또 셋째 아들의 이름도 '발기(發岐)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이 기록은 <삼국지> 위지 고구려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인데 <삼국지>가 고국천왕 사후 그의 아우들에 관한 내용을 잘못 인식한 오류라는게 일반적인 견해이고, 발기 사후 200여년의 시간의 간격이 있은 후에 그 후예의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비약이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 무덤이 혹시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무덤은 아닐까? 고구려는 2대왕인 유리왕 때 지금의 집안인 국내로 수도를 이전하였으므로 이 환인지역에서 장사를 지낸 임금은 동명성왕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삼국사기>에 근거가 되는 기록이 나온다.

 

▲장군묘 주변 산세

 

▲장군묘 주변 산세

 

▲장군묘 주변 산세

 

 

○十九年, 夏四月, 王子<類利>自<扶餘>與其母逃歸. 王喜之, 立爲太子. 秋九月, 王升遐, 時年四十歲. 葬<龍山>, 號<東明聖王>.

19년 여름 4월, 왕의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해오니, 왕이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왕이 별세하였다. 이 때 왕의 나이 40세였다. 용산에 장사지내고, 호를 동명성왕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뿐만 아니라 게다가 유리왕 22년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도 신대왕, 고국천왕, 동천왕, 중천왕, 고국원왕, 안장왕, 평원왕 등 국내성 시대의 왕들이 홀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 始祖廟.

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신대왕>

 

○二年, 秋九月, 王如<卒本>, 杞{祀} 始祖廟.

2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천왕>

 

 

▲장군묘 주변 산세

 

▲장군묘 주변 산세

 

▲장군묘 주변 산세

 

○二年, 春二月, 如<卒本>, 祀始祖廟. 大赦.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천왕>

 

○十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13년 가을 9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중천왕>

 

○二年, 春二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巡問百姓, 老病賑給. 三月, 至自<卒本>.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내고,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늙고 병든 자들을 구제하였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또한 장수왕 15년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에도 역시 홀본의 시조묘에서 제사를 지냈다.

  

○三年, 夏四月, 王幸<卒 {卒本}> , 祀始祖廟. 五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邑貧乏者, 賜  三斛 /人一斛.

3년 여름 4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5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읍의 가난한 자들에게 한 사람마다 곡식 한 섬씩을 주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안장왕>

 

○二年, 春二月, 王幸<卒本>, 祀始祖廟. 三月, 王至自<卒本>, 所經州郡, 獄囚除二死, 皆原之.

2년 봄 2월, 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의 사당에 제사지냈다. 3월, 왕이 졸본에서 돌아오다가 도중의 주, 군의 죄수들 중에서 사형수를 제외하고 모두 사면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평원왕>

 

▲장군묘 주변 산세

  

▲배장묘2

 

▲배장묘 표석

 

 

   동명성왕은 홀본의 용산에 묻혔고 그 뒤 임금들이 자주 찾아가서 제사를 드렸으므로 분명히 능이 있었을 것이고 잘 관리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홀본이 환인이라면 이 곳에 동명성왕의 묘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 된다. 환인에서 발견된 무덤 가운데 가장 크고, 용산의 꼬리 부분에 해당하는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미창구 장군묘가 동명성왕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 것은 어디까지나 정황증거일 뿐 이를 뒷받침 할만한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되고 있지 않다. 게다가 4~5세기로 추정되는 고분벽화 양식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장수왕 15년 평양 천도 이후 동방을 제패한 패권국가 고구려의 자부심은 고구려 사람들로 하여금 새 서울과 옛 수도에 대형 기념물들을 만들게 하였고, 완성된 기념물들이 왕실의 신성성과 국가 권위의 상징이 되게 하였다. 널방 전체가 연꽃으로 장식된 (전)동명왕릉, 유사한 무덤구조의 장식무늬 벽화고분인 미창구장군묘 역시 평양 천도를 계기로 고구려가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던 왕실 신성화 작업의 산물인지도 모른다. 첫 수도 졸본에 조성되어 있던 동명왕묘를 개축, 혹은 신축하면서 ‘王’자문과 연꽃무늬로 무덤칸 내부를 장식하여 새 왕의 즉위의례 장소로 삼고, 새 서울 평양에는 국가 및 왕실 차원의 정기적인 시조묘 제사를 위해 새롭게 동명왕릉을 축조하게 한 것은 아닐까. 역시 여래의 가호를 받는 왕권임을 나타내기 위해 연꽃을 벽화의 주제로 삼을 수도 있었지 않을까.

 

▲배장묘13

 

▲배장묘 표석

 

▲배장묘3

 

▲배장묘 표석

 

 

 

<2011. 8.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