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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가는 길 - 중국 길림 동단산성

蔥叟 2011. 10. 14. 05:23

부여 가는 길 - 중국 길림 동단산성

 

   중국 길림성 길림시 강남향 영안촌의 서남쪽에 있는 동단산(252m)에 있는 3중으로 된 고구려의 토축 산성이다. 길림시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의 동쪽 강안에 있으며 북으로 용담산성과 마주보고 있다. 이 산성을 부여의 왕성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송화강에서 상대높이 60m쯤의 독립된 구릉에 있으며, 타원형을 이루면서 흙과 돌을 섞어서 만들었다.

 

▲동단산성

 

▲동단산성

 

   정상부를 평탄한 대지로 만든 내성은 거의 성벽을 남기지 않았으나 동서 길이 62m, 남북너비 15m의 범위가된다. 중성은 내성의 동남향한 경사면을 따라 53.5m 내려간 지점에서 다시 산허리를 타원형으로 돌려서 동서길이가 170m, 남북너비가 62m, 성벽의 높이는 12m이다. 외성은 중성에서 다시 35m 쯤 내려와 역시 타원형으로 산을 돌려 쌓았는데, 동서길이 230m, 남북너비 115m, 둘레는 약 650m에 이르고 성벽의 높이 10m이고 성벽 윗면의 너비 3m이다. 내성은 근대에 군사적 보루로 이용되면서 파괴되었고, 외성에는 동쪽과 서쪽에 문터가 있었고, 동북쪽 모서리에 저수지도 있었다. 성안에서는 청동기시대로 부터 고구려에 이르는 시기의 토기와 기와가 발견되고 있다.

 

▲동단산성

 

▲동단산성

 

   이 산성의 동쪽과 동남쪽으로는 평지까지 둘러 쌓은 커다란 판축의 토성이 있어서 별도로 이것을 '남성자(南城子)'라 부른다. 남성자는 높은 대지상에 황토흙을 다져 쌓은 둥근 타원형의 성으로 "성책을 만드는데 모두 둥글게 하였으며 감옥과 비슷하다"는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과 들어맞아 부여의 왕성임이 유력하다. 이 성벽은 길이가 1,050m에 달하며, 성벽의 높이가 5~6m이고, 성벽 윗면의 너비가 1m 남짓하다. 성벽의 외곽으로는 또 해자가 돌려져 있으나, 성벽은 남동쪽이 뚜렷할 뿐이다. 문터는 남문터와 북문터가 있다. 남문은 16m가 단절되었는데, 바로 안족에 남북 길이 150m, 동서너비 73m 크기로 1~1.5m 높이의 긴네모꼴 고대지(高臺地)가 있다. 북문터는 44m 너비로 성벽의 단절부가 있다. 성안에서는 한(漢)에서 고구려를 거쳐 발해시기에 이르는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동단산성

 

▲동단산성

 

   동단산성은 남성자 및 북쪽의 용담산성과 더불어 고구려와 관련되는 것일 뿐 아니라 부여의 원책(圓柵)과 합치되는 요소가 있어서 전기부여의 왕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건재는 용담산에서 동단산에 이르는 지역이 부여의 왕성이었다고 추측하고, 무국훈은 동단산 동남쪽의 남성자가 중국 측 기록에 보이는 부여의 원형성책과 같으며, 후일 고구려가 점령한 시기의 유물이 풍부하므로 역사기록에 나오는 녹산(鹿山)과 결부하여 부부여의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동단산의 북족 2.5km 거리에 있는 용담산성 및 그 주변의 삼도령자산성(三道嶺子山城)과 함께 동단산성을 용담산성의 위성으로 보는 동학증은 용담산성을 북부여성으로 보아 부여 발상지로 여기고 있다.

 

▲동단산성

   

▲동단산성

 

   예맥족의 한 종족인 부여족은 일찍부터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 평원을 개척, 서단산 문화라는 수준 높은 문화를 영위하면서 우리 역사상 고조선에 이어 두번째로 국가체제를 마련했다. 전성기 부여의 영토는 사방 2,000리에 미쳤다. 가운데에 도읍이 있어 왕이 다스렸고, 도읍 밖으로 나라를 넷으로 나우어 대가(大加)들이 맡아 온나라를 5개 지역으로 분리통치했다.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부여의 네 지방을 '사출도'라고 표현하였다. 부여의 지배자인 가(加)들은 서로 의논해서 왕을 추대하기도 했고, 가뭄이나 홍수가 들어 농사를 망치면 그 책임을 물어 왕을 갈아치우거나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왕을 배출한 부족은 세력이 매우 강해서 궁궐, 성책, 감옥, 곳간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동단산성에서 본 용담산성

  

▲동단산성에서 본 길림시

 

   부여는 고조선이 존재하던 기원전 2세기경 처음 역사상에 등장한다. 이후 494년 고구려에 항복할 때까지 700여년 동안 만주일대를 주름잡았던 우리 민족의 고대국가였다. 기원후 부여 사회의 모습을 잘 묘사하고 있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 부여조에는 이 나라가 "매우 부유하고 시조 때부터 남의 나라에 패해본 일이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부여는 경제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통치력과 군사력이 매우 강했다. 길림시의 노하심 지역의 나무곽무덤에서는 '황금의 나라'라는 기록처럼 황금 허리띠 장식 등 각종 금제 장신구와 철갑옷, 칼 등 많은 철제무기가 출토되어 부여 대가들의 강력한 세력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동단산성에서 본 길림시

 

 

 

<2011. 8.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