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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광개토태왕비

蔥叟 2011. 8. 3. 06:36

고구려 가는 길 - 중국 집안 광개토태왕비

 

   광개토태왕비(廣開土太王碑)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복군주, 가장 위대한 고구려의 왕으로 칭송받는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의 능비로서 높이가 6.39m에 이르고 무게가 37톤으로 추정되는 세계적 규모를 지니고 있다.414년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사후2년)이 세웠으며 높이만 3층 건물과 맞먹고, 방추형의 자연석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배면 너비는 1.46미터, 1.35미터 2미터 1.48미터로 각 면이 다른 크기와 문양을 지니고 있다. 땅에 비석을 고정시켜 주는 대석과 비문을 새겨진 비신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석은 길이 3.35m, 너비 2.7m의 불규칙한 직사각형이고, 두께는 약 20cm이나 고르지 않으며 비신에는 총 1775자의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개석 (蓋石)이 없는 고구려 석비 특유의 형태라고 한다.

   고구려 특유의 호방한 필체로 쓴 비문은 현재까지 한,중,일 학자들에 의해 약 1500여자 정도가 해석되어져 있는데 내용은 크게 고구려 건국과정과 광개토대왕의 대외 정복사업과 업적, 수묘체계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라는 광개토왕의 시호(諡號)를 따라 중국에서는'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불린다."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고(廣開土境) 민생을 편안하게 보살핀(平安) 하늘과 같이 큰 왕(好太王)의 업적을 기록한 기념비"라는 뜻이다.현재는 1982년에 중국 당국에 의하여 새로 건립된 단층의 대형 비각 속에 있으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공원처럼 주변 경관이 잘 꾸며져 있다.

 

   비문 가운데 신묘년조 기사는 특히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新羅 以爲臣民->로 판독되는  신묘년 기사는 완전 유실되어 해독이 불가능하며 나머지 글자도 학자에 따라 판독이 다르거나 불분명한 글자가 섞여 있다. 일본은 1889년 <회여록>에서 "백잔 ,신라는 본디 속민이었으므로 원래 조공을 하였다. 그런데 왜는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 백잔 신라를 쳐 부수고 신민으로 삼았다." 고 해석하였고, 이는 곧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다.그러나 여러 정황과 사료를 살필때 "破"의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된 것이 아닐까하는 견해가 국내에서는 더욱 인정받고 있는 편이고, 아직까지 각종 학설이 난무하는 가운데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

 

▲광개토태왕비각

 

▲광개토태왕비각

 

▲광개토태왕비

 

▲광개토태왕비문(남면)

 

▲광개토태왕비문(서면)

 

▲광개토태왕비문(북면)

 

▲광개토태왕비문(동면)

 

 

 

<2011. 7.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