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전봉성사터(傳奉聖寺址)
봉성사(奉聖寺)는 성전사원 가운데 하나이다. 신라가 백제, 고구려를 멸하고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하던 무렵에 그 도읍지 경주 일대에 집중적으로 조성한 7개 사찰로서 국가가 직접 관리한 곳을 삼국사기에서는 성전사원(成典寺院)이라 칭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열된 순서대로 보면 이들 성전사원은 사천왕사(四天王寺), 봉성사(奉聖寺), 감은사(感恩寺), 봉덕사(奉德寺), 봉은사(奉恩寺), 영묘사(靈妙寺), 영흥사(永興寺)가 된다.
▲'永泰二年 奉聖寺' 銘 납석계 뚜껑 파편
봉성사는 신문왕 5년(685)에 창건되었다. 성전(成典)을 두었다고 했으니 나라에서 관리하는 중요한 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五年春三月, 奉聖寺成.
5년 봄 3월에 봉성사가 낙성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신문왕전>
○奉聖寺成典, <景德王>改爲修營奉聖寺(-使)院, 後復故{古}. 衿荷臣一人, <景德王>改爲檢校使, <惠恭王>復稱衿荷臣, <哀莊王>改爲令. 上堂一人, <景德王>改爲副使, 後復稱上堂. 赤位一人, <景德王>改爲判官, 後復稱赤位. 靑位一人, <景德王>改爲錄事, 後復稱靑位. 史二人, <景德王>改爲典, 後復稱史.
봉성사성전: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수영봉성사사원으로 고쳤다가 뒤에 이전의 명칭으로 회복시켰다. 여기에는 1명의 금하신이 있었는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검교사로 고쳤다가 혜공왕 때 다시 금하신이라 하였고, 애장왕 때 영으로 고쳤다. 상당은 1명이었는데 경덕왕 때 부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상당으로 고쳤다. 적위는 1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판관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적위라고 하였다. 청위는 1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녹사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청위라고 하였다. 사는 2명인데 경덕왕 때 그 명칭을 전으로 고쳤다가 뒤에 다시 사라고 하였다.
<삼국사기 잡지 제7 관직 상>
그러면 봉성사가 누구를 위한 원찰일까?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삼국유사에 나오는 봉성사 관련 기록을 존중해 신문왕이 신충(信忠)이라는 한 개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봉성사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재위 655-661년)를 위해 세운 왕실 원찰(願刹)이라고 여겨진다.
○神文王이 등창이 나서 혜통(惠通)에게 치료를 청했다. 혜통이 와서 주문을 외우니 그 즉시로 등창이 말짱하게 나았다. 혜통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전생에 宰相으로 계셨는데 그때 창고지기 관원이던 信忠이란 자를 잘못 재판하여 종으로 삼았으므로, 신충이 원망을 품고 윤회 환생할 때마다 보복을 하게 됩니다. 지금 이 등창도 그래서 생긴 것이오이다." 왕은 이 말이 옳다고 생각하여 즉시 절을 세워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 이름을 지었다. 절이 이루어지자 하늘에서 외치는 소리가 났다. "왕께서 절을 세워 주셔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 하늘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원망은 이미 풀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나서 다시 소리난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세웠는데 절과 절원당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삼국유사 권5 혜통항룡(惠通降龍)조>
하지만 삼국유사가 말하는 신문왕과 신충, 나아가 절원당에 얽힌 설화는 허구이며, 실제는 이보다 약 100년 뒤에 일어난 효성왕 혹은 경덕왕과 신충(信忠)에 얽힌 악연과 관계 있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충은 신라 최고 신료인 상대등(上大等)으로 있다가, 경덕왕 22년(763)에 무슨 일인가에 연루되어 시중(侍中) 김옹(金邕)과 함께 면직되었다고 한다.
○二十二年, 秋 八月, 上大等<信忠>․侍中<金邕>免.
22년, 가을 8월, 상대등 신충과 시중 김옹이 퇴직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덕왕전>
나아가 삼국유사에는 신충은 즉위 전 효성왕과 잣나무 아래서 바둑을 자주 둘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으나, 막상 즉위한 효성왕이 공신 목록에서 자신을 빼자 왕을 원망하는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효성왕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 어진 선비 신충과 더불어 대궐 뜰의 잣나무 밑 에서 바둑을 두며 하루는 말했다. "뒷날에 만약 내 그대를 잊는다면, 저 잣나무가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자 신충은 일어나서 절을 했다. 그 후 몇 달 뒤 효성왕이 즉위하여 공신들에 게 상을 주면서 신충을 깜빡 잊고 명단에 넣지 않았다. 이에 신충이 원망스런 노래를 지어 이를 잣나무에 붙였더니 나무가 갑자기 말랐다. 왕이 이상히 여겨 여러 사람을 보내어 살펴보게 했더니 노래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크게 놀라며 말했다. "정무가 복잡하고 바빠 하마터면 각궁(角弓)을 잊을 뻔 했구나." 하며 신충을 불러 벼슬을 주자 잣나무는 그 때야 살아났다. 그 노래는 이러하다.
<삼국유사 신충괘관조>
봉성사가 신문왕 시대에 창건됐음을 고려할 때, 사찰 경내, 혹은 가까운 곳 어딘가에 세웠다는 '원한을 끊은(혹은 끊는) 건물'이란 뜻을 지닌 절원당(切怨堂)이란 건물은 효성왕-경덕왕 시대의 사람인 신충(信忠)과 관련해 이해해야 한다. 봉성사는 '봉성'(奉聖)이라는 사찰 이름 자체에서 왕실 원찰임을 증명하고 있다. 다른 성전사원들로서 신라왕실이 선대왕을 위해 각각 세운 원찰들인 감은사(感恩寺), 봉덕사(奉德寺), 봉은사(奉恩寺)와 같은 맥락을 이룬다. 즉, 감은(感恩), 봉덕(奉德), 봉은(奉恩)은 모두가 선대왕을 염두에 두었듯이, 봉성(奉聖) 또한 선대왕의 성스러움을 받든다는 의미가 있다.
그런 점에서 봉성사는 실제 완공은 신문왕 5년이지만, 다른 신라의 국찰들이 대체로 창건에서 완공까지 적어도 10년 이상 걸린 점을 고려할 때, 창건이 시작된 시기는 문무왕 대로 볼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봉성사가 추복(追輻)의 대상으로 삼은 인물은 문무왕 아버지인 태종무열왕 김춘추일 수밖에 없다. 또 신라 제52대 효공왕 시대(912년)의 사정을 전하는 삼국유사 기록에 봉성사의 남문(南門) 규모가 총 21칸에 달했다고 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도, 봉성사가 단순히 개인의 원혼을 달래기 위한 사찰일 수는 없으며, 왕실 원찰임이 분명해 보인다.
○第五十二, 孝恭王, 光化十五年壬申[實朱梁乾化二年也]奉聖寺外門, 東西二十一間, 鵠巢.
제 52대 효공왕 시대인 광화15년 임신-실은 주량의 건화 2년(912).-에 봉성사 바깥문 동서쪽 21간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삼국유사 혜공왕조>
삼국유사에 나와있는 전설로 미루어 볼 때 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만 해도 봉성사가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혜공왕때 봉성사의 밭 가운데서 蓮이 났다는 기록도 있다.
○至二年丁未, ...중략... 先*時{是}宮北厠圊中二莖生, 又奉聖寺田中生蓮.
2년 정미에 이르러 ...중략...이보다 먼저 대궐의 북쪽 측간 속에서 두 줄기의 연(蓮)이 나고 봉성사의 밭 가운데에서도 연이 났다.
<삼국유사 혜공왕조>
한편 봉성사터(奉聖寺址)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된 '영태이년(永泰二年) 봉성사(奉聖寺)' 명(銘)이 기록된 납석제 뚜껑 파편이 인왕동 월성동사무소 앞의 가로수를 뽑아 낸 자리에서 발견되었다. 명문 납석제 뚜껑 파편은 지름이 7.9㎝, 두께 2.1㎝, 높이 4.1㎝로 반(半)정도가 깨어져 나간 상태이며, 탑이나 불당에 봉안했던 사리호의 두껑이다. 판독된 명문은 고졸(古拙)한 해서체로 13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래는 26~28글자가 새겨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명문은 다음과 같이 판독된다.
○永奉, 二年, 七月, 一(?)△ㆍㆍㆍㆍ北方, 奉聖, 寺也(?)'
'영태이년'은 신라 혜공왕 2년으로 서기 766년에 해당된다. 납석제 뚜껑은 8세기대의 금석문 그 자체로서도 매우 중요하지만 절터가 실전(失傳)된 성전사원의 위치를 찾게 돼 불교사 및 신라왕경(王京)과 관련된 역사지리 연구에 결정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8개의 성전사원 가운데 사천왕사, 감은사, 영묘사, 황룡사를 제외한 나머지 사원은 지금까지 그 위치를 알지 못했다. 조선왕조시대 중종 25년(서기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도 '봉성사는 부(府)의 동쪽 4리(在府東四里)에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동경잡기에도 '부의 동쪽(府東) 4리'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2011. 6.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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