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문화순례◈/낙양문화권

중국 안양 은허부호묘(殷墟妇好墓, Fùhǎomù)

蔥叟 2010. 11. 25. 06:38

중국 안양 은허부호묘(殷墟妇好墓, Fùhǎomù)

 

   궁전종묘유적지 서남쪽에는 1976년에 발굴한 한 여인의 무덤이 있다. 상대 귀족묘 중 가장 유명한 이 묘는 중국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여장군인 부호묘(妇好墓)이다. 부호묘는 은허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상태로 보존된 상대왕실고분으로 매장된 청동기 유물에는 은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이자 왕이었던 무정(武丁)의 아내 부호(妇好)라고 무덤의 주인을 밝힌 명분이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남북길이 5.6m, 동서너비 4m, 길이 7.5m인 묘실에서는 청동기 460여개, 옥기 750여개 등 총 1,928점의 부장품과 함께 16명의 순장한 유골이 발견되었다. 아쉽게도 이곳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청도기 유물은 하남성박물원에 전시되어 있다.

 

은허부호묘(殷墟妇好墓)

  

   중국 허난성 안양시 은허 유적에서 1976년 발견 발굴된 부호묘(婦好墓). 묘실 규모는 남북 5.6m, 동서 4m, 최대 깊이 7.5m이며 지상에는 향당(享堂)이라고 하는 능상(陵上) 건축물을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옥기 755점, 뼈 제품 564점, 청동기 468점, 석기 63점, 도기 11점, 상아제품 5점 등이 쏟아졌으며 순장자 16명에 개 6마리 또한 죽여서 묻은 것으로 밝혀졌다.

 

   부호(婦好)는 상나라 임금 무정(武丁)의 비(妃)로 전쟁터에 나갔던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장군이다. 부호묘의 발굴은 1928년 이후 은허 궁전종묘유지에서 제일 중요한 고고발견으로 공인됐고 그해 전국 10대 고고발견에 들었다. 부호묘는 은허에서 유일한 완벽하게 보존된 상나라 왕실성원의 고분이다. 무덤은 동서로 4m, 남북으로 5.6m, 깊이 7.5m이고, 위에는 '모신종(母辛宗)'이라는 향당(享堂)이 있다.

 

은허부호묘(殷墟妇好墓)

 

   무덤에서 발굴된 정교한 수장품은 1,928개나 되는데 그가운데에 청동기 468개, 옥기 755개, 골기 564개이고 다른 것은 병기·연장·악기이다. 그중의 삼련(三聯), 우방이(偶方彛), 효존(?尊), 사모신사족굉(司母辛四足?) 등은 다 역사상 유례없는 진보이다. 또 화폐 6,800여 개, 순장 유골 16구 있다. 이들 정교한 순장품은 양도 많고 종류도 풍부하며 양식도 신기로운데 상나라 시대 아주 높은 수공업생산수준을 충분히 나타내서 진귀한 중국 국가급국보라고 할 수 있다.


   부호묘에서 발굴된 명문 청동기 190점 가운데 ‘부호(婦好)’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무려 109점이었다.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상형문자로 새겨진 ‘부호’ 명문은 그동안 확인된 갑골 복사에서 보이는 은(상)의 무정왕(武丁·BC 1250~BC 1192년)의 법정 배우자
인 바로 그 ‘부호’였다. 무정왕은 은(상) 말기의 걸출한 중흥군주였다. 갑골기록을 종합할 때 무정왕의 여인은 모두 64명에 이른다. 그런 무정왕에게 비무(비戊), 비신(비辛), 비계(비癸) 등 3명의 법정배우자가 있었는데, 비신은 바로 부호가 죽은 뒤 받은 시호이다.

 

은허부호묘(殷墟妇好墓)

 

   갑골문에 따르면 부호는 제사와 점복을 직접 행했을 뿐 아니라 무정의 명을 받아 정복전쟁에 직접 나선 천하의 여걸이었다. 갑옷에 말을 타고 청동과(戈·꺾창)를 든 위풍당당한 여장군 부호. 그는 1만3000명을 이끌고 강족(羌族)은 물론 귀방(鬼方)과 토방(土方)을 토벌했다. 부호는 동남쪽의 오랑캐를 치라는 명을 받는다. 그런데 오랑캐의 세력이 만만치 않음을 간파한 부호는 전선에서 암중모색하며 기다린 끝에 단번에 적을 쳐서 전멸시킨다. 서남쪽 오랑캐인 파방(巴方)을 정벌할 때는 적의 퇴로를 미리 읽어 군사를 매복시킨 뒤 이곳으로 퇴각하는 적군에 결정타를 먹인다.

   당시 국가의 대사인 제사와 군대
를 주재하고 지휘한 부호는 정치활동가이자 군사전략가이면서 야전사령관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평소에는 영락없는 여인이었으며, 무정왕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갑골을 보면 무정왕이 부호의 건강을 챙기는 등 깊은 사랑을 쏟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호가 임신했을 때는 누차에 걸쳐 점을 쳐 그의 분만시기(産期)에 관심을 보였다.

 

은허부호묘 동방뢰(铜方罍)

 

   이형구교수에 의하면 갑골문에는 ‘모신종(母辛宗)’이라는 귀절이 있다. 신(辛)은 부호의 죽은 뒤 시호이고, 종(宗)은 사당을 뜻하는데, 76년 발굴한 부호묘(지하) 위에 향당(享堂)의 흔적이 있다. 이것은 동이의 나라인 전국시대 중산국 왕릉과 장군총 등 고구려와 백제 적석총 위에 남아있는 향당의 흔적과 같은 것이다.

   이렇듯 동이의 후예인 부호는 ‘여인천하’를 이끈 불세출의 여걸이었다. 하지만 부호가 중심이 된 여권(女權) 국가는 은의 뒤를 이은 한족(漢族)의 나라 주나라 때부터 급전직하한다. 여인의 지위는 신권-족권-부권의 밑인 최저층으로 미끌어진 것이다. 부호도 역사의 기록에서 철저하게 배제되었다. 이처럼 3200년간 수수께끼로 남아있던 부호였지만, 중국 최초의 여성 고고학자 손에 역사의 전면에 나타난 것이다.

 

은허부호묘 동봉구화(铜封口盉)

 

 

 

<2010.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