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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안양 은허궁전종묘유지(殷墟宮殿宗庙遗址)

蔥叟 2010. 11. 24. 06:03

중국 안양 은허궁전종묘유지(殷墟宮殿宗庙遗址)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에 있는 고대 상(商)나라 수도 유적으로 2006년에 유네스코 세게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유적에서 파낸 귀갑(龟甲)과 우골(牛骨)이 용골(龙骨, 학질의 묘약)로서 베이징의 약방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1899년 이것을 사들인 유악(刘颚)이 갑골문자가 새겨진 것을 발견하였고, 고대사학자들의 주의를 끌어 뤄전위(罗振玉), 왕궈웨이(王国维) 등이 연구하여, 상(商)왕조의 점술사가 왕가를 위하여 점을 친 점괘의 기록이라는 것을 밝혀내었다. 1915년 뤄전위는 소둔촌을 방문하여, 갑골 외에도 청동기, 옥기 등을 입수하였다. 1928년 중화민국 중앙연구원 역사어연구소가 둥줘빈(董作宾), 리지(李济)를 중심으로 은허 발굴을 실시하였으나, 아직도 넓은 유적 전체에 미치지 못하고 그 성과도 완전히 발표되지 않았다.

  

은허궁전종묘유지(殷墟宮殿宗庙遗址)

  

▲갑골문발현지(甲骨文發現址)

 

   은허 가운데 거주유적은 주로 샤오툰촌 북방 위안수이강(洹水) 연변 대지(台地)에 나타난다. 토단을 쌓아올린 위에 궁전초석과 토단 주위에는 많은 구덩이식 거주유적이 있다. 종묘, 제왕, 왕족의 주거는 지상에 있고, 백성은 지하식인 수혈에 있었다. 샤오툰 교외에서는 도기, 골기, 동기를 만든 장인의 공장과 주거지가 많이 발견되었다. 위안수이강 북쪽의 허우자좡, 다스쿵촌에는 상왕조의 왕묘로 보이는 다수의 거대한 묘가, 지하 10m 이상 깊은 곳에 만들어졌다. 왕, 왕족의 널은 다수의 시종과 비첩의 순장으로 둘러싸여있다. 묘실에는 청도기 옥기 등의 보물이 있었는데, 그 호화로움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고, 말, 원숭이, 코기리 등의 동물 전용 갱이 있는 것도 있다. 아마도 생전에 기른 도물까지 순장된 듯하며, 죽은 뒤에도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이 생활할 수 잇다고 생각한 결과일 것이다.

 

   상대의 청동기는 과(戈)와 같은 무기 보다는, 오히려 신을 받들어 모시기 위한 주기, 식기, 악기가 주류를 이루었다. 조상을 상징하는 괴수 무늬가 전면에 빈틈없이 새겨졌는데, 그 정교함은 전세계에 유례를 찾을볼 수 없다. 왕, 귀족들은 4두마차를 타고 다녔으며, 도한 전쟁은 차전이었다. 무관촌의 대묘에는 네 마리의 말뼈를 수반한 마차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궁전 옆의 수혈 등에서는 대량의 귀갑과 우골이 나왔는데, 점술사가 왕조의 조상에 대한 제사의식을 점친 문장이 새겨져 있다. 갑골문자의 해독과 왕묘의 유물에서 상 왕조 왕후, 귀족의 생활상을 대체로 상상할 수 있다.

 

   은허 청동기는 발달의 최고정점에 잇던 것으로서, 청동기 우래의 경로를 알지 못하였으나, 1950년 이후 중국전토에 걸친 발굴이 진행되면서, 각지에 상왕조 시대 유적이 발견되었다. 특히 하남성 정주의 유적에서 나온 청동기 유물 가운데에는 안양의 왕묘에서 나온 것보다 원시적인 것이 포함되어 있어, 청동기 발달경로가 판명되었다. 은허 유적은 규모가 크고, 출토된 호화로운 청동기 등의 미술품이 우수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신전과 더불어 고대문화의 보고이다.

 

은허박물원(殷墟博物苑)

 

은허박물원(殷墟博物苑)

 

   광대한 나라, 중국에는 역사적 가치가 높고 명성이 있는 도시를 선정한 '7대 고도(古都)'가 있다. 요나라부터 현재까지의 수도 베이징(北京)을 비롯해 시안(西安), 뤄양(洛陽), 난징(南京), 카이펑(開封), 항저우(杭州), 안양(安陽)이다. 이 가운데 외국인에게 가장 덜 알려진 곳이 안양이다. 국내에는 거의 소개된 적이 없고, 1천 쪽이 넘는 여행책자인 '론리 플래닛(Lonely Planet)'의 중국 편에도 안양에 대한 정보는 단 두 쪽에 불과하다. 도보 여행을 할 때 참고할 만한 흔한 지도도 첨부돼 있지 않다. 그만큼 생경한 지역이다.

   하지만 '시간'만을 놓고 7대 고도를 비교하면, 안양을 따라올 수 있는 도시는 없다. 시안과 뤄양이 3천 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안양이 번성한 시기는 약 3천300년 전이다. 고고학적으로 실재(實在)했다고 판명된 중국의 가장 오랜 왕조인 상나라의 도읍, 은허(殷墟)가 위치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상나라는 '은'이라는 국명으로 더 익숙하지만, '은'은 상나라의 후반기를 지칭할 뿐이다. 사실 상나라는 19세기 후반까지 진실과 허구의 사이에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등장하지만, 실존했다고 믿을 만한 유적이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1899년 안양에서 '갑골문자(甲骨文字)'가 발견되면서 설화 속에 갇혀 있던 상나라가 현실로 나타났다. 갑골문자는 한자의 효시가 된 상형문자로 거북이의 등딱지나 소의 뼈에 새겨져 있었다. 상나라의 점술사들은 갑골문자를 통해 국가의 명운을 점치기도 했다.

 

   기원전 1300년 무렵부터 255년 동안 12명의 왕이 거주했다는 은허는 상나라의 다양한 유적들이 전시돼 있는 박물관과 여전히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너른 대지, 귀족의 무덤 등으로 구성된다. 그중에서 가장 먼저 들러야 할 곳은 상나라에 대해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박물관이다. 은허 박물관의 전시물은 갑골문자, 청동기, 옥기와 석기 등 세 가지로 나뉜다. 인류가 발명한 4대 고대문자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갑골문자 유적뿐만 아니라 청동으로 제작된 정교한 물품과 토기도 흥미롭다. 중국의 한 역사학자는 "은허의 도시, 문자, 청동기는 중국의 찬란한 고대 문명을 대표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갑골문(甲骨文)

 

▲갑골문(甲骨文)

 

   1899년 중국 베이징 한약방에 약재로 팔리던 갑골(甲骨)에서 발견된 갑골문(甲骨文)은 중국사 뿐만 아니라 인류 문명사의 혁명이었다. 이를 통해 인류 문자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고, 중국사에서는 그 무렵 전설로만 치부되던 은상(殷商)이란 왕조가 역사로 재림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한약방에 약재로 공급되던 갑골이 심상치 않음을 확인한 이는 왕거웨이(王國維.1877-1927)였다. 고문자학에 일가를 이룬 그는 갑골문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그것이 상나라 때 문자이며, 나아가 그것이 집중 출현하는 곳이 허난성(河南省) 안양현(安陽縣) 샤오툰촌(小屯村)이란 사실까지 밝혀냈다. 그러면서 그는 바로 이곳이야말로 상왕조 반경(盤庚)이 천도한 이후 마지막 제신(帝辛), 즉 폭군으로 이름높은 걸왕(紂王)에 이르러 멸망할 때까지 상왕조 후기 수도일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왕궈웨이는 자신의 추정이 사실임을 확인하지 못하고 1927년 쿤밍호(昆明湖)라는 호수에 투신자살함으로써 삶을 마감했다. 그가 죽은 지 1년 뒤인 1928년, 중국 중앙연구원 조사단이 샤오둔촌에 나타나 발굴을 개시했다. 이렇게 시작된 조사는 1937년 중일전쟁으로 중단되기까지 모두 15차에 걸친 발굴로 이어져 갑골문 외에도 청동기를 비롯한 금속기, 고분 등의 유적을 대량으로 발견했다. 이 때 발굴단 주축은 둥쭤빈(董作賓)과 리지(李濟)였다. 이들은 나중에 모두 대만으로 갔다.

   은허 발굴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 재개돼 1986년까지 계속됐다. 그 결과 출토 갑골만 총 15만 점을 헤아리고 왕릉임이 확실한 고분도 13기가 발굴됐다. 현재까지 조사 성과에 의하면 은허 유적은 동서 길이 6㎞, 남북길이 4㎞ 가량이며 그 규모나 출토 유물의 양과 질로 볼 때 상왕조 후기 수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졌다. 이에 힘입어 1961년에는 한국의 사적에 해당하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되고 2006년 7월에는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이를 세계유산으로 만드는 데는 한국 고고학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를 정년퇴임한 김병모 명예교수가 그 현지실사를 벌여 세계유산으로 등재해도 좋다는 'OK' 사인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했으며, 이를 유네스코 총회가 승인했다.

 

 

 

▲갑골문(甲骨文)

 

   청 말기인 1889년 어느 날, 갑골의 파편이 한 병든 학자의 집에 찾아들면서 3천년이 넘도록 땅 속에 감추어져 있던 은나라의 신비가 밝혀지게 되었다. 그 학자의 이름은 왕의영. 그는 당시 유일한 국립대학이었던 국자감의 제주, 즉 대학총장으로 있었는데, 금석학 등 고학문에 조예가 깊어서 그의 문하에는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고, 그중에는 유철운도 있었다. 왕의영은 말라리아라는 지병이 있어서, 특효약으로 소문난 용골을 갈아서 약재로 쓰고 있었다. 용골이란 북경원인의 발굴에도 단서를 제공했던 바로 그 동물의 뼈이다. 용골이 막 빻아지려는 순간, 마침 그곳을 지나던 유철운이 문득 범상치 않은 글자의 흔적을 발견했다. 4년 후 그는 (철운장귀)라는 기념비적인 책을 발간, 세간에 갑골문의 존재를 널리 알렸다.

  용골의 출처를 찾아 나섰던 왕의영과 유철운에게 비자의 기업비밀을 쉽사리 알려줄 약재상은 없었지만, 이제는 골동품상을 통해 글자가 있는 용골이 고가에 거래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에서 하천이 범람, 갑골의 파편이 대량으로 발굴되었다. 이 지역은 1928년부터 10년간 본격적인 발굴이 진행, 기원전 15년경부터 은이 주에게 멸망되었던 기원전 1100년경까지, 즉 은 후기의 도읍지 은허였음이 확인되었다.

   은나라의 본래 이름은 상, 황하연변의 수많은 성읍국가 중의 하나였던 상읍이 주변의 성읍국가들과 연합, 주도권을 구축해나갔다. 아직 대규모 수리공사도 없었던 시절, 농경지는 제한되어 있고, 주변에는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호시탐탐 농경민을 약탈하고자 하는 종족들이 있었을것이니, 농경민들은 서로 연합하게 되고 은족은 그 중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사기)의 은 본기에 의하면, 탕왕에 이르러 하나라의 걸왕을 쓰러뜨리고 주변국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지위는 불안정하여 수도를 다섯 번이나 옮긴 후에야 은허에 정착하게 되었다.

  거대한 도시유적 은허에서 가장 중요한 발굴은 역시 수만 편에 달하는 갑골편이다. 갑골은 점복에 사용되던 귀갑과 수골을 줄인 말로, 귀갑은 거북의 등껍질보다 배껍질이 많고, 수골은 소의 어깨 뼈가 많다. 이제 겨우 한자를 배우기 시작한 초보자의 눈으로도 갑골문 몇 자는 확인할 수 있듯이, 갑골문자는  한자의 원형이면 문장의 구조도 오늘날의 중국어와 같다. 세계의 고대문명 중에서 중국처럼 일관된 문화를 유지해온 나라는 없다.

 

▲갑골문(甲骨文)

 

▲갑골문(甲骨文)

 

   갑골문의 연구는 왕의영, 유철운을 이어 나진옥과 그의 제자 와국유에 의해 집대성되어 은대의 사회를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삶이 모두 비극에 끝나 사람들은 이를 갑골문의 저주라고 부르기도 했다. 왕의영은 의화단 사건 이후, 외국 군대가 중국에 진주하게 되자 이에 분노, 자결했고, 백화문으로 사회를 풍자한 (노잔유기)를 남기기도 하고 기인으로 유명했던 유철운은 백성들의 참상을 보다 못해 정부의 허가 없이 관곡을 풀어 나누어준 죄로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유철운의 친구였던 나진옥은 일본에 망명했다가 만주 괴뢰정권에 관련,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청말의 대표적인 학자로 유명한 왕국유는 언제나 전통복장을 하고 변발을 허리께까지 드리우고 다녔는데,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에게 제왕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청조의 몰락을 바라보다가 이를 비관하여 자살로써 인생을 마감했다.

   은의 왕실은 국가의 행사를 결정할 때마다 갑골로써 점을 쳐서'신의 뜻'을 묻고는, 갑골에 언제, 누가, 어떠한 내용으로 점을 쳤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지를 기록했는데, 그것이 바로 갑골문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국가의 중대사란 기상이나 자연현상, 농사의 풍흉, 자연재해, 제사, 전쟁, 수렵, 임신, 질병 등 온갖 것이 다 포함되며, 갑골은 일회용으로 사용된 것이기 때문에 은허의 한 갱에서는 한꺼번에 1만 7천 7백 편의 귀갑이 출토되기도 했다.

   우선 갑골의 뒷면에 구멍을 내어 단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낸다음, 이곳을 불로 지지면 균열이 생기게 된다. 이때의 균열의 형태나 수, 주변의 색깔 등으로 신의 뜻을 판단했다. 그것을 판단하는 자가 바로 왕이다. 왕은 신과 인간사회를 매개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다. 이러한 신정정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의 위대한 힘 앞에서 맥없이 무력감을 느껴야 했던 초기국가의 일반적인 정치형태다. 은나라 사람들은 10개의 태양이 땅 속에 있다가, 매일 하나씩 교대로 천상에 나타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열흘 간격으로, 또 다음 태양이 떠오르는 밤마다 일상적으로 점을 쳤다. 그 열 개의 태양의 이름이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 즉 10간이다.  그들은 절대신인 상제로부터 10개의 태양신, 각종 자연신을 숭배했으면, 조상들이 이들에게 자신들의 간절한 바람을 전해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조상숭배를 각별히했다. 제사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왕의 가장 중요한 업무의 하나였다.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화려한 제단이 마련되고 술도 빚어졌다. 제단에는 수백 마리의 양, 소 등의 동물과 함께, 피정복민이 적게는 몇 명, 많을 때는 수천 명씩 목이 잘려진 채 제물로 바쳐졌다. 제사의 제물을 바치기 위한 전쟁이 수행되기도 했다. 은왕은 수천 명의 귀족 전사와 함께 대규모 원정을 수없이 감행했는데, 은나라에 복속된 연맹부족들은 공물을 바치고, 유사시에 병력을 제공하는 한편, 은의 제사를 공동을 받들었다. 즉, 당시의 제전은 은의 지배력을 확인하는 유일한 의식 절차로서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은허회갱(殷墟灰坑)

 

▲은허회갱(殷墟灰坑)


   은허에서 갑골문 다음으로 찬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청동기들이다. 그 제작기술은 흔히 서양의 르네상스기에 비견되는데, 특히 청동제기의 정교함과 세련미는 따라갈 것이 없다. 제기는 반드시 하나씩만 만들어졌으니, 제사에 바친 그들의 정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이었고, 그들에 의해 무기나 제기로만 사용되었다. 그들은 청동무기로 무장, 지배력을 주변지역으로 확대해나갔으며, 신의 후예임을 자처, 화려한 제사의식으로 백성들을 위압해나갔다.

   생산활동은 오로지 평민들이 전담하게 되었지만, 생산기술에는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그들은 청동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되어 여전히 토기나 목기, 석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반지하기 움집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왕을 살아서는 회랑으로 둘러싸이고 다시 토성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궁궐에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고, 죽어서는 청동기, 옥기 등이 대량으로 부장된 화려한 무덤에 매장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특히,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것은 대규모 순장의 풍습이다. 대형 묘에는 수백,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왕의 사후 생활을 편의를 위해 생매장되었다. 아마도 이들은 전쟁포로이거나 피정복민 노예였을 터였다. 훗날, 진시황의 무덤에서는 수천의 도용들이 이를 대신하게 되니, 생산력의 발달은 지배와 전쟁의 목적을 단순히 수확물을 얻기 위한 것에서, 토지와 백성의 획득을 위한 것으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2010. 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