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영동태백문화권

삼척 수로부인공원

蔥叟 2010. 6. 15. 06:42

삼척 수로부인공원

      

   추암의 남쪽 바닷가에 '수로부인공원'이라는 곳이 있다. 그리고 공원 안에는 '해가사의 터'라는 첨탑형 조형물도 세워놓았다. 삼국유사 수로부인조의 이야기를 원용하여 삼척시에서 조성해 놓은 공원이다. 

  

수로부인공원 해변

  

   성덕왕 때에 순정공이 강릉태수로 부임을 할 때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 곁에 있는 바위의 봉우리가 바다를 병풍처럼 둘러쳐서 굽어보고 있었는데 그 높이는 천장(千丈)이나 되고 그 위에는 철쭉꽃이 만발하였다. 공의 부인 수로가 그것을 보고 좌우를 둘러보고 말을 하였다. "어느 누가 저 꽃을 꺾어다 나에게 주겠는가?" 종자들이 대답하였다. "저 곳은 사람의 발자취가 이르지 못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모두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 때 한 노옹이 암소를 몰고 그 곳을 지나다가 부인의 말을 듣고 꽃을 꺾어 가지고 와 노래를 지어 바쳤다. 그 늙은이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또 이틀을 순행하며 임해정에 다달아 점심을 먹을 때 바다의 용이 나타나 홀연히 부인을 끌고 바다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땅을 치며 주저앉았으나 아무런 계책이 없었다. 이 때 한 노인이 나타나서 말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중구삭금(衆口鑠金)이라 하였으니 바다 속의 짐승이 어찌 여러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계내(界內)의 사람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막대기로 언덕을 치면 부인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공이 그 말을 좇아 행하였더니 용이 부인을 받들고 나와 바치었다. 공이 바다 속의 일을 물으니 부인이 대답하였다.

 

수로부인공원 해변

 

   "7보(寶)로 장식된 궁전에 음식은 달고 향기로운 것이 인간의 음식은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몸에서 기이한 향기가 풍기었는데 세상에서 맡아보지 못한 향기였다. 수로부인은 그 용모가 세상에서 견줄 이가 없었으므로 번번이 깊은 산이나 큰 못을 지날 때에는 신물(神物)들에게 붙들림을 당하곤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해가(海歌)를 불렀는데 가사는 다음과 같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어놓아라

                남의 부인을 앗아간 죄가 얼마나 큰지 아는가.
                만약에 거역하여 놓지 않는다면
                그물로 너를 잡아 구워 먹으리.

 

   노인의 헌화가는 다음과 같다.

 

                붉고 짙은 바위 가에
                잡은 암소 놓게 하고
                나를 부끄럽다 아니하시면
                꽃을 꺽어 바치오리라.

 

<삼국유사 '수로부인'조>

    

수로부인공원 해변

 

   수로부인공원에는 또 노옹이 헌화하는 모습을 그려 넣은 구형(球型) 조형물과 헌화가를 새겨 넣어 '헌화가의 터'까지 이곳임을 말하고 있다. 백성들이 부른 노래가 바다노래, 즉 해가(海歌)였는데, "여러 사람이 해가를 불렀는데 그 가사에 이르기를 ……(衆人唱海歌, 詞曰……)"이라는 대목을, "여러 사람이 해가사를 불렀는데, 이르기를……(衆人唱海歌詞, 曰……)"이라고 잘못 새겨서 '해가사의 터'라고 이름지은 것 같다. 수로부인 일행이 명주(溟洲)로 가는 노정(路程)에서 헌화가의 현장이 먼저 나온 다음 그 이틀 후에 해가의 현장에 이른다고 되어 있어 헌화가의 현장과 해가의 현장은 이틀의 시차와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수로부인공원에는 두 장소를 한곳으로 설정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로부인을 납치해갔던 바다 용을 중앙정부에 항거하던 지방호족으로 보고, 지방호족이 수로부인을 돌려줌으로써 양자 간의 갈등이 적당히 무마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해 왔는데 근래 한신대 조태영 교수가 이 대목을 새롭게 해석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조태영 교수는 '『삼국유사』수로부인 설화의 신화적 성층과 역사적 실재'라는 논문에서 '수로부인'조를 "성덕왕 대의 역사를 조명하는 신화적 약호"로 보면서 『삼국유사』의 찬자인 일연은 "이 신이(神異) 속에 성덕왕대 역사를 압축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 내용을 축약해 보면 이렇다.
  

수로부인공원 해변

  

  1)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純貞)공은 『삼국사기』 경덕왕 원년의 기사에 나오는 이찬 순정(順貞)과 동일인이다.
  2) 수로부인의 호칭 '부인'은 왕의 삼친(三親) 부인, 즉 왕비, 왕모, 왕비모에게 내려지는 위호(位號)이다.
  3) 이찬 순정과 수로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폐출된 삼모(三毛)부인이다.
  4) 성덕왕 때 강릉 태수로 부임했던 김순정의 딸이 경덕왕 잠저(潛邸) 시에 왕자비로 있다가 효성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태자 헌영이 왕위에 올라 경덕왕이 되면서 태자비 삼모는 왕비가 되었다. 이때 수로부인도 왕비모가 되어 '부인'으로 책봉되었다.
  5) 경덕왕의 왕비 삼모 부인은, 수로부인의 젊은 시절 그녀가 동해안 임해정에서 동해 용에게 잡혀갔다 돌아와 낳은 용녀(龍女)일 가능성이 있다.

  조태영 교수는 5)항의 추리근거를 '수로부인'조 기사 중, 수로부인이 동해 용에게 붙들려 갔다가 구출된 피납 사태를 서술하는 논조(論調)에서 찾고 있다. 논문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해중사(海中事)를 고백하는 수로의 말에서 악룡에게 작해(作害)를 당했다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부인이 옷에서는 이상한 향기가 풍겼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향내였다'라는 기술은 수로가 신성(神聖)과의 접촉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듯이 보이기도 한다. 수로가 동해용과 관계하였음을 자못 암시하면서도 그것을 공공연히 노출시키기는 꺼리는 태도가 감지된다. 수로부인의 피납 사태를 한편으로는 불상지사(不祥之事)로 표현하면서 한편으로 신성한 듯이 표현하는 '시각의 이중성'을 발견할 수 있다."
  

'해가사의 터'조형물

 

  조태영 교수는 이 일을 '용녀(龍女)왕비 탄생'으로 부르면서 '용녀 출생담'이 수로부인 설화 형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신화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항간의 구설에 떠도는 정도였던 것이 나중에 수로부인의 딸이 경덕왕비가 되자 이 이야기가 한때 경덕왕비 삼모부인의 탄생설화로 지위가 상승되어 수로부인 설화에 들어왔던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런데 '수로부인'조에 용녀왕비 탄생담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삼모부인의 신성(神聖)탄생이 불상지사로 뒤바뀌는 상황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고 있다. 즉, 삼모부인을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의 변전(變轉)과 설화 전승권의 변동, 그에 따른 해석의 변화와 설화 성층(成層)의 재조정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삼모부인은 경덕왕 2년에 폐비, 출궁되어 사량부인으로 봉해졌고, 의충 각간의 딸이 후비로 들어와 만월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이 사실은 수로부인 설화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삼모부인의 폐출로 그녀의 탄생은 다시 불상지사로 비하되고 신성설화의 지위를 상실했으리라는 추정이다. 그리하여 수로부인의 미자(美姿)설화만 잔존, 전승되게 되면서 경덕왕비 탄생설화는 그것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흔적만 남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 조태영 교수의 설명이다.
  
   이러한 분석은 '수로부인'조의 마지막 대목, 납치되었다가 구출된 수로부인의 발언이 주는 묘한 여운을 '시각의 이중성'이라는 말로 잘 설명해 주고 있을 뿐 아니라, 성대(聖代)라고 불리웠던 성덕왕 이후, 신라 하대로 접어드는 효성왕과 경덕왕 대의 정세 변화를 설명해 주는 단서도 아울러 제공해 주고 있다.

 

 

 

<2010. 5.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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