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낙남문화권

불보종찰 순례 -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蔥叟 2010. 6. 8. 09:39

불보종찰 순례 -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계단은 불사리(佛舍利)를 모시고 수계의식(授戒儀式)을 집행하는 장소이다. 금강은 금속 중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예리하기 때문에 불교의 경론 속에서 굳고 단단한 것의 비유로 쓰이고 있다. 금강계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라는 뜻이다. 의정(義淨)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 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나란타 사원의 금강계단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계단은 인도에서 유래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금강계단

  

금강계단

  

   중국의 경우 당나라 때 도선(道宣)이 정업사(淨業寺)에 이 계단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사리를 얻어 귀국한 후, 통도사를 창건하면서 이 계단을 만든 것이 최초이다. 당시의 계단 형태는 인도·중국의 것과 유사했으리라 추정되나, 현재 남아 있는 통도사의 계단은 고려·조선 시대에 여러 차례 중수(重修)된 것으로서 우리나라 전통적 양식으로 정착한 형태이다.

 
   자장은 선덕왕 5년(636)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 중국 오대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643년 귀국한다. 부처님 진신사리와 대장경 일부를 모셔온 스님은 서라벌의 황룡사와 울산의 태화사 그리고 통도사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통도사에는 금강계단에 모셨다고 한다. 금강계단이 설치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자장이 당나라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 문수보살상 앞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을 때의 일이다. 문수보살은 승려로 화하여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백과,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 뼈(指節), 염주, 경전 등을 주면서 말했다.

 

금강계단 석문

  

금강계단 석문

 

   “이것들은 내 스승 석가여래께서 친히 입으셨던 가사이고 또 이 사리들은 부처님의 진신사리이며, 이 뼈는 부처님의 머리와 손가락뼈이다. 그대는 말세(末世)에 계율을 지키는 사문(沙門)이 될 것이므로 내가 이것을 그대에게 주노라. 그대의 나라 남쪽 취서산(鷲栖山․영축산의 옛이름) 기슭에 독룡(毒龍)이 거처하는 신지(神池)가 있는데, 거기에 사는 용들이 독해(毒害)를 품어서 비바람을 일으켜 곡식을 상하게 하고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다. 그러니 그대가 그 용이 사는 연못에 금강계단을 쌓고 이 불사리와 가사를 봉안하면 삼재(三災 : 물, 바람, 불의 재앙)를 면하게 되어 만대에 이르도록 멸하지 않고 불법이 오랫동안 머물러 천룡(天龍)이 그곳을 옹호하게 되느니라.”

 

   자장은 귀국하여 선덕왕과 함께 취서산을 찾아서 독룡들이 산다는 못에 이르러 용들을 위해 설법을 하였다. 그런 뒤 자장은 못을 메우고 그 위에 계단을 쌓았다. 이때 자장에게 항복한 독룡은 모두 아홉 마리였는데, 그 가운데서 다섯 마리는 오룡동(五龍洞)으로 ,세 마리는 삼동곡(三洞谷)으로 갔으나 오직 한 마리만은 그곳에 남아 터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였으므로 자장은 그 용의 청을 들어 연못 한 귀퉁이를 메우지 않고 남겨 그 용을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그곳이 지금의 구룡지인데 규모가 작은 타원형의 연못이지만 아무리 심한 가뭄에도 수량이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통도사사리가사사적약록(通度寺舍利袈裟事蹟略綠)>

 

   그런데 금강계단에 봉안된 사리는 그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변화를 겪는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려 초에 사리와 가사를 덮은 석종이 개봉된 사실이 있었다. 문헌상으로 볼 때 사리에 손을 댄 최초의 기록이다.

 

▲사리탑

  

▲사리탑

  

   세상에서는 말하기를 고려조에 들어와서 연거푸 두 명의 안렴사(按廉使)가 돌 뚜껑을 열고 예배를 하였는데, 앞사람은 큰 구렁이가 함 속에 있는 것을 보았으며 뒷사람은 큰 두꺼비가 돌 위에 쭈그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후부터는 이것을 들지 못하였는데, 근래에 상장군 김이생(金利生)과 시랑(侍郞) 유석(庾碩)이 고묘조(高廟朝 : 고려 고종)때에 왕의 명령을 받고 강동(江東) 지방을 지휘하다가 임금의 신임장을 가지고 절에 가서 그 돌을 들고 예배를 하고자 하니 절의 중이 예전 일을 빙자하여 이를 꺼리는지라, 두 사람이 군사들을 시켜 기어코 이것을 들었더니 안에 작은 돌함이 있고 함 속에는 겹으로 유리통을 채우고 통 속에는 다만 사리 네 개가 있어 예배를 하게 해두었다. 그 통에는 조금 상하여 터진 데가 있었는데 유공이 마침 수정함 한 개를 준비하였던 것이 있어서 이것을 시주하여 함께 간직하도록 하고 이 일을 기록해 남겼으니 이 해가 바로 강도(江都)로 수도를 옮긴 지 4년째 되는 을미년(1235)이다. 「고기(古記)」에는 사리 100개를 세 곳에 나누어서 간직하였다는데 여기에는 다만 네 개뿐인 것을 보면 사리는 원래 사람에 따라서 숨고 드러나서 많게도 보이고 적게도 보이는 것이니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니다.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前後所藏舍利)조>

 

   또한 고려 말 동해변에 왜적의 침입이 빈번할 무렵에 통도사의 주지였던 원송(月松) 대사는 우왕 3년(1377)에 왜적이 내침하여 사리를 가져가려 하자 그것을 가지고 도망쳤으며 1379년에는 사리를 가지고 통도사를 빠져나와 서울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왜적들이 계단을 파괴하고 사리와 영골(靈骨)을 탈취하였으나 포로로 붙잡혔던 동래의 백옥(白玉)거사가 사리와 영골을 가지고 도망쳐 나왔다. 그후 선조36년(1603) 사명대사는 왜적의 침탈을 염려하여 사리를 크고 작은 두 개의 함에 넣어 스승인 서산대사에게 보냈다. 서산대사는 “영남이 침해당하고 있는 이 마당에 동해변에 있는 이곳 금강산도 안전하지 못하다. 영축산은 문수보살께서 친히 계단을 설치하라고 부촉한 장소이다. 계를 지키지 않는 자라면 그에게는 오직 금과 보배만이 관심의 대상일 것이고, 믿음의 보배인 사리가 목적이 아닐 것이니 옛날 계단 터를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라”라고 하면서 한 함을 돌려보내고 다른 하나의 함은 태백산의 갈반사(葛盤寺, 현재의 정암사로 추정)에 봉안하게 했다. 사명대사는 서산대사의 명을 받고 계단을 수리하여 사리를 안치하였다.

 

▲사리탑

 

▲신장상

  

   이와 같은 금강계단의 역사를 보면 현재 금강계단에 소장되어 있는 사리는 자장이 봉안할 당시의 사리가 그대로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으며 그 수도 많이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기록대로라면 사리는 수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고 하니 그것을 확인하려는 것은  어리섞은 일이다. 신앙은 신앙으로서 존재할 뿐이니까.

 

   적멸(寂滅).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na)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번뇌의 불을 끈 상태로 깨달음을 이뤘음을 뜻한다. 불자들은 부처님이 괴로움을 여의고 열반, 즉 적멸을 이뤘음을 믿는다. 비록 석가모니 부처님의 육신을 이 세상과 인연을 다했지만, 정각(正覺)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한다. 줄여서 ‘보궁’이라 한다. 진신(眞身)을 모셨기에 불상을 따로 조성하지 않는다. 적멸보궁 또는 적멸궁으로 불리는 이 법당 뒤편에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통도사), 탑(정암사, 법흥사, 봉정암), 탑비(상원사)를 모셔 놓는다.

 

   우리나라에 진신사리를 모셔온 이는 자장율사이다. 스님은 신라 선덕왕 12년(643)에 부처님의 정골(正骨), 불아(佛牙), 불사리 100과(顆), 부처님이 입으시던 가사(袈裟)를 모셔와 통도사 계단과 황룡사 구층탑에 봉안했다. 자장스님에 의해 모신 사리가 현존하는 적멸보궁은 모두 다섯 곳이다. 경남 양산 통도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강원도에 있다. 설악산 봉정암, 오대산 상원사 중대, 영월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등이다. ‘5대 적멸보궁’이라 칭한다. 이들 도량에는 사시사철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부처님이 항상 머물러 계시면서 열반의 기쁨을 누리는 곳이 적멸보궁이다. 불자들은 적멸보궁을 성지순례하며 부처님께 기도한다. 쌀 한말 짊어지고 보궁을 순례하는 할머니들의 신심과, 높은 산 험한 골, 마다 않고 찾는 불자들의 정진은 한국불교의 생명이다. 그래서 적멸보궁은 한국불교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도량이다. 번뇌를 끄려는 중생들의 원력을 다짐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신장상

 

 

 

<2010. 5.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