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고향 - 청주 흥덕사터(興德寺址)
충북 청주시 운천동에 있는 사적 제315호 흥덕사의 절터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를 주조한 절터로 우리나라 인쇄주조의 연원(淵源)으로 중요한 곳이다. 흥덕사터는 그동안 문헌상으로만 청주목외(淸州牧外:청주교외) 흥덕사라고만 전하여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았었는데 1985년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흥덕사터 유물이 발굴됨으로서 확인된 것이다. '興德寺'명문이 새겨진 금구(禁口)와 청동불발(靑銅佛鉢)이 출토되어 이곳이 흥덕사터였음이 밝혀졌고, '大中三年'銘 기와를 통해 통일신라말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흥덕사터 전경
▲복원된 금당과 석탑
○甲寅五月日西原府興德寺禁口臺坐改造入重參拾貳斤印
갑인년(甲寅年) 5월 일. 서원부 흥덕사의 금구(禁口) 1개를 개조(改造)하였다. 무게는 32근이 들어갔다.
<'西原府興德寺'銘 금구>
○皇統十年庚午四月日興德寺依止重大師領仁往生淨土之愿佛鉢一盂具鈒雲▲入重二斤二兩印
황통 10년 경오년(의종 4, 1150) 4월 일. 흥덕사(興德寺)에 의지(依止)하고 있는 중대사(重大師) 영인(領仁)이 극락정토(極樂淨土)에 왕생(往生)하기를 발원하면서 불발(佛鉢) 1개를 바쳤는데, <결락> 들어간 무게가 2근 2량이다.
<'皇統十年'銘 청동불발>
금고에 새겨진 양각문은 字徑 2cm의 정자체로 썼으며, 현재 15字만이 남아 있으나, 그 아래로 시주한 사람의 이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시대의 양식을 잘 따른 연화문과 당초문 등의 문양이나 "서원부(西原府)"라는 지명 등으로 볼 때, 금구의 제작연대에 해당하는 "갑인년(甲寅年)"은 954년(고려 광종 5)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당
▲강당터
청동불발(佛鉢)의 구연부(口緣部) 외측면에 새겨진 40字의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어서 흥덕사터(興德寺址)를 재확인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황통십년경오(皇統十年庚午)"는 고려 의종 4(1150)년에 해당되어, 이 일대에서 함께 출토된 유물들의 年代 추정은 물론 흥덕사의 연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곳이 바로 고려 우왕 3년(1377) 금속활자를 직접 주조하여 경한스님이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인쇄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 유적지임을 알려주는 유물이었다. 이곳에서 인쇄된 불조직지심체요절은 독일의 인쇄술 창시자인 요한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 1397~1468.2.3)가 1440년에 인쇄한 《세계심판》보다 63년 앞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우리나라의 국보급 귀한 유물인데 프랑스에 약탈당하여 지금은 프랑스 파리국립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경한(景閑, 1299~1374)스님은 고려시대의 승려로 황해도 해주 북숭산에 있는 신광사(神光寺)의 주지를 지내며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고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을 저작(著作)하였다. 불조직지심체요절이란 보통 직지심경(直指心經)으로 불리는데 보통 부처님의 말씀이나 불법의 진리를 기록한 책을 불경이라 하는데 직지심경은 고승들의 법어 즉 부처님의 말씀을 강론하는 요체(要諦)를 담은 책이다. 조계사 등의 큰스님들이 불법을 강론한 내용을 기록한 책과 같은 것이다.
▲강당터
▲강당터
발굴결과 남북방향으로 중문, 탑, 금당, 강당이 있고, 그 좌우에 회랑이 둘러져 있었다.발굴당시 금당터의 동쪽 끝과 남쪽끝은 파괴되어 그 원형을 알 수 없었으나, 북면과 서면이 잘 남아있어 이를 토대로 건물의 형태를 복원할 수 었었다.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로 측면의 중앙칸은 다른 칸보다 넓은 편이다. 기단은 원토층이 석비례층 위에약117*30*15cm, 37*29*11cm 크기의 화강석을 다듬어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65*65*17cm의 면석을 놓았음이 확인되었으며,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은 가구식기단으로 추정된다.
주초석은 굴곡이 심한 부식암반층을 정지하고 낮은 부분은 진흙다짐을 한 후 주먹 크기의 자갈돌을 적심으로 하고 그 위에 자리잡고 있다. 또한 금당의 가장 큰 특징은 외곽의 주초는 2단으로 양각된 원형주초를 사용하였도 내부는 모두 방형주초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북면의 중앙에 계단석이 남아있으며 계단 양측에 작은 맷돌을 세웠던 홈이 마련되어 있고 작은 맷돌의 잔편이 금당터 서쪽에서 1개 출토되어 모양이 잘 갖추어진 계단으로 추정되는데 남면에도 있었음이 확실시되나 발굴 전에 이미 파괴되었던 듯하다.
▲동회랑터
▲서회랑터
금당터의 기단석 밖으로 석렬을 쌓아 기단형식의 건물구를 만들었는데, 이는 후에 보수한 건물이라기 보다는 건물을 초창할 때의 기단유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금당의 서북편에는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고 토층으로 볼 때에도 불을 먹은 층임이 역력히 나타나고 있어 금당은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음이 확실하다.
금당터 북쪽으로 14.5m 떨어진 곳에 화강석으로 잘 치석된 기단석렬이 5.6m 정도 나타나고 있는데 강당터의 남쪽면이다. 강당터는 현재 남쪽 기단석렬과 적심석 일부만 남아있어 강당건물의 규모와 구조는 알 수 없고 금당터와 남북으로 일직선상에 건축된 초창당시의 유적임은 확실하다. 고려시대에 중창될 때 강당터는 다시 건축되지 않았으며 서편으로는 상당부분의 다른 건물터가 중복되어 나타나고 있어 현재의 강당터유구는 신라시대의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남회랑터
▲흥덕사터 유구
기단석은 석비례층 위에 바로 올려놓았는데 지반이 낮거나 기단석의 두께가 얇은 부분은 쐐기돌을 박아 수평을 유지시켰다. 기단석렬 위에 60*33*10cm의 면석 1개가 남아있어 강당터 역시 금당터와 마찬가지로 지대석, 면석, 갑석을 사용한 가구식기단으로 생토층 위에 바로 지대석을 놓은 양식과 함께 신라시시대의 통상적인 양식이다. 적심은 현재 앞 열에 3기와 중간 열에 1기가 남아있다. 북쪽의 뒷열은 지표면이 후대의 경작 등으로 낮아져서 유실되었다. 강당의 건물구조는 대략 정면 3칸에 축면 2칸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강당터의 서편에 있는 작은 건물터는 정면과 측면이 모두 2칸씩이며,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 강당터의 서편에 있으면서 강당터와 3중으로 겹쳐져 있는 것으로 보아 후대의 건물임이 분명하며, 이일대에서 출토된 와당의 문양도 금당터나 회랑터의 유물들과 확연히 구별되어 흥덕사터의 마지막 건물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형태의 건물터가 강당터 동편에도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는데, 그것은 택지조성사업에 의한 훼손으로 말미암아 건물터의 성격을 규명해내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다른 건물터와 달리 바닥에 전돌을 깔고 있어서 특별한 용도의 작은 건물터임이 분명한 곳이다. 따라서 ‘직지’와 ‘자비도량참법집해’의 간행에 사용된 금속활자와 인출도구 등의 인쇄관련 공방이었거나 기타의 경판을 보관했던 경판각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흥덕사터 유구
▲흥덕사터 유구
금당터에서 서쪽으로 1.4m 지점에 서회랑터의 동면기단축대가 나타나 있어 서회랑터는 금당터와 매우 인접해 있는 편이다. 남북의 길이는 45m, 동서폭대(東西幅臺)는 5m인데 회랑터는 직성형으로 길게 이어져 정면 13칸, 측면은 1칸을 이루고 있다. 이 서회랑터는 초석과 기단 및 고막이 들의 상태로 보아3구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금당터 앞뜰의 서편인 회랑의 남쪽부분(1구역)과 금당 서편과 인접한 중간부분(2구역)과 그 북부지역(3구역)에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즉 1구역의 4칸은 특별한 시설이 없으나 2구역의 6칸은 금당과 통하는 문터(門址)와 같은 시설이 보이고 3구역의 3칸은 기단 폭이 넓어져 있다. 또한 고막이의 형태로 보아 회랑터는 각 구역마다 특별한 시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토층으로 볼 때 역시 2~3회의 중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009.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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