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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산책 - 경주 무첨당

蔥叟 2009. 11. 2. 10:00

양동마을 산책 - 경주 무첨당

 

   무첨당(無添堂). 더럽힘이 없는 집. 동쪽에 살림채. 서쪽에 별당인 무첨당. 그리고 그 사이 높은 곳의 사당영역으로 이루어진 이씨 대종가의 다른 이름이다. 이언적의 아버지 이번이 양동에 장가들어 어느 정도 기반을 잡은 후인 1508년에 살림채를 건립했고, 이언적이 경상감사 시설인 1540년경에 별당을 건립했다. 말하자면 이언적의 본가가 되며, 여강이씨 무첨당파의 파종가로서, 또 여러 분파들의 맏집인 대종가로서 역할 해왔다.

 

▲무첨당 전경

  

▲무첨당

  

▲무첨당

  

   종가로서 무첨당의 의도는 매우 강렬하고 직설적인다. 대지의 중앙, 가장 높은 곳에 사당 영역을 마련하고, 살림채와 별당채 사이에 직선의 가파른 계단을 설치해 사당이 이 집의 중심임을, 이 집은 대종가임을 강하게 표현하였다. 별당과 사당은 살림채와 향을 달리하여 다른 안대를 취하고 있고, 사당 앞에 서면 일족의 서당인 강학당과 가문 정자인 심수정을 바라보게 된다. 정확히 말하자면 심수정과 강학당은 자신들의 대종가인 무첨당 사당채를 안대로 삼아 자리잡았다. 그만큼 이 집의 사당이 갖는 마을 내의 위상은 대단한 것이다.

 

   반면 무첨당 세 건물 사이의 공간 관계는 어정쩡하게 독립적이다. 건물들 사이에 적절한 외부공간이 만들어지지 못했고, 단지 살림채의 사랑부분이 별당쪽의 마당을 향하고 있어서 대종가의 의례적인 공간만을 형성한다. 살림채와 사당간, 또는 건물들 주변에는 일정 공간이라 부를 것이 없다.

 

▲무첨당

 

▲무첨당 대청마루

 

▲'무첨당(無添堂)' 편액

 

   그러나 별당의 형태와 공간은 아주 강렬하다. ㄱ자 건물로 누마루가 돌출하여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모퉁이에 방을 배치하고 모서리 부분을 모두 마루로 처리한 칸살잡이도 거전적인 수법이다. 적절한 비례를 가진 형태와 날렵한 머마선, 섬세하게 조각된 초익공과 화반대공을 갖는 등, 최고로 장식적인 건물이다. 시원하게 터진 대청마루에 앉아 마을의 전경을 보거나, 넓은 마당에 위풍당당한 별당을 우러러 보면 대종가로서 위엄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살림채는 매우 소박하고 간결하여, 대종가의 위세에 맞지 않을 정도가.

 

   무첨당은 양동마을 물봉골 서북방에 남향하고 있는, 여주 이씨 회재 이언적의 종가 제청이다. 무첨당의 당호는 이언적의 장손 이의윤의 호로서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한다는 뜻이다. 종가의 배치는 안채 우측에 자형의 제청(祭廳)인 무첨당이 위치하여, 제청 좌측에 사랑방과 대청, 안방, 부엌, 부속방 등으로 이루어진 冂자형 본채가 있다. 본채 앞으로 부속채가 일자로 위치하여 전체적으로 부속채와 본채가 튼 口자 형을 하고 있다. 안채 뒤편 높은 곳에 부조묘(不祧廟, 불천위 사당)가 위치하고 있다. 제청과 사당, 정침은 각각 독자적인 향위(向位)를 하고 있다. 대문 입구부의 전면에 무첨당이 위치하는 것은 부조묘와 위치적인 상관관계를 고려하며, 지형의 특성에 순응한 배치이다.

 

▲'창산세거(蒼山世居)' 편액

 

▲무첨당 안채

 

▲무첨당 안채

 

   제청인 무첨당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두고 향 좌측방 앞에 누마루를 돌출시켜, 건물은 ㄱ자형을 하고 있다. 향 우측방 오른족으로 작은 온돌방과 마루를 두어 제기 등의 보관 장소로 활용하며, 지붕은 가적지붕으로 처리하였다. 누마루는 동측면은 개방되고 남서면은 창호로 되엇으며, 남측의 창은 필요시 들어올릴 수 있는 들문을 달았다. 좌우 온돌방과 대청 사이의 창호는 들문으로 처리되어 필요시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도록 처리하였다.

 

   제청은 누마루 부분과 주요 공간인 대청에는 원형기둥이며, 나머지는 방형기둥을 세웠다. 초석은 상부에 원형주좌를 둔 신라시대 초석을 활용하였으며, 기둥 상부는 최서 끝단 혀를 두 갈래로 한 초익공계로 짜 맞추고 5량 가구에 홑처마이다. 종량 상부에 첨차형 부재와 소로를 끼워 넣은 화려한 파련대공이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무첨당 안채

 

▲무첨당 사당

 

▲무첨당 사당

 

   본채는 사랑방, 대청, 안방, 부엌, 건넌방으로 구성된 匚자형과 본채 전면의 一자형 부속채가 튼 口자형을 이루면서 동남향하고 있다. 부속채와 본채 사이에 중문이 나 있어 안마당과 연결된다. 사랑 영역은 무첨당 쪽 사랑마당에서 바라보아 정면으로 위치하며, 중문간으로부터 대청 1칸과 2칸의 사랑방으로 구성되었다. 안채의 영역은 정면 2칸인 안대청 사이에, 좌측에 안방 2칸과 그 옆에 3칸 크기의 부엌과 부엌 앞으로 건넌방이 위치하고 있다.

 

   부속채는 중문 쪽에서부터 마루방 1칸과 온돌방 3칸 및 헛칸 2칸과 곳간으로 구성되어 있다.안채 뒤쪽의 높은 곳에 삼문을 내고 별도로 일곽을 이룬 부조묘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과 퇴칸으로, 전면은 개방되고 바닥은 전돌로 마감하고 단청을 하였다. 

 

▲'左海琴書'편액

 

▲'勿厓書屋'편액

 

▲'五棣書室'편액

 

   별당인 무첨당에는 많은 편액이 걸려있다. '무첨당'은 제청의 당호이자 이 집의 이름이다. '無忝'은 시경 小宛의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서, 너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분들을 욕되게 하지 마라"(夙興夜寢 無忝爾所生)에서 유래한다. 이를 회재의  맏손자인 이의윤이 호로 사용하면서 당호가 되었다. 동쪽 방문 위에는 '左海琴書' 편액이 걸려있다. 좌해는 서울의 왼편인 영남지방을 말한다. 금서는 귀거래사의 "친척들이 정다운 이야기에 기뻐하고, 거문고와 서책을 즐겨 시름을 잊으리라."(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에서 유래하니 선비의 주위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좌해금서'는 영남에서 선비가 머물고 있는 마을 이라는 의미이다.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기 전에 무첨당을 방문해 대나무에 먹을 찍어서 썼다는 글씨이다.

 

   무첨당 동방에는 '蒼山世居' 편액이 있다. 창산은 무첨당의 뒷산인 설창산을 이름이다. 창산세거는 설창산자락에 대대로 살아왔음을 말한다. 서쪽 방문 위에는 '勿厓書屋' 편액이 걸려있다. 물애는 무첨당이 위치한 물봉골과 같은 말이다. 물은 공자와 안연과의 대화에 나오는 사물(四物)에 비견된다. 서옥은 서방에 목자(目) 서고(書庫)가 있었기 때문이다. 용방 조광이 썼다. 서방에는 또한 '五棣書室' 편액이 있다. 체는 시경 상체의 "상체의 꽃이여, 드러나게 활짝 피었지 않은가. 무릇 지금 사람들은, 형제 같은 이 없느니라."(常棣之華 鄂不韡韡凡今之人 莫如兄弟)에서 유래한다. 오체는 다섯 형제이니 회재의 다섯 손자를 말한다. '오체서실'은 다섯 형제가 공부하던 서실을 말한다.

 

▲대문

 

 

 

<2009. 10.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