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서안 초당사 구마라집 사리탑(鳩摩羅什舍利塔)
초당사 대웅보전 뒷편에 구마라집의 사리탑이 있다. 사리탑은 방형의 부도각 안에 있다. 사각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하대석, 중대석, 그리고 상대석을 얹었다. 그 위에 팔각의 탑신부가 있다. 탑신부에는 '요진삼장법사구마라집사리탑(姚秦三藏法師鳩摩羅什舍利塔)'이라 새겨진 명문과 각종 기하문양과 자물쇠가 새겨진 문비가 있다. 탑신부 위에는 사각으로 이루어진 옥개석을 얹었다. 옥개석은 한옥의 추녀마루가 사실적으로 새겨졌다. 옥개석 위로는 앙화, 보륜, 보개가 차례대로 얹혀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팔각원당형 승탑을 닮았지만 상,중,하대석이 원형이라는 점과 옥개석이 4각이라는 점이 특이하다.
구마라집(鳩摩羅什, Kumarajiva. 344~413. 또는 350~409)은 구자국(龜玆國) 출신이다. 鳩摩羅什, 鳩摩羅什婆, 구마라기바, 구마라시바, 구마기바 등으로 음사하고, 줄여서 라집, 집 이라고 하며 동수(童壽)라고 한역한다. 구마라는 성이고, 집은 이름으로, 아버지 구마라염과 어머니 기바를 합한 이름이다. 그의 생몰연대는 여러 자료마다 다른 점이 많다. 입멸한 연대에 대하여 『출장삼장기집』에는 405년-418년 사이라고 하였고, 승조의 『구마라집법사뢰』에는 ‘413년 나이 70세가 되던 해 4월 13일 大寺에서 입적하였다’고 하였으며, 『양고승전』에서는 405년, 406년, 409년 등 세 가지 설을 기록하였다. 일반적으로 『구마라집법사뢰』의 설을 근거로 하여 413년을 입멸연대로 하고, 이 때의 나이가 70세 라고 한 것을 근거로 거꾸로 계산하여 태어난 연대는 344년 으로 보고 있다.
▲사리탑각
▲사리탑각 편액
▲구마라집 사리탑
구마라즙(鳩摩羅什)은 삼장법사(三藏法師)로서 경장(經藏)ㆍ율장(律藏)ㆍ논장(論藏)에 뛰어난 위대한 번역가이다. 현자(賢者)로서 인도학 및 베다학에 관하여 백과전서적인 지식을 가졌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산스크리트 불교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한 4대 역경가(譯經家)들 가운데 가장 정평이 나 있는 사람으로서, 불교의 종교사상과 철학사상이 중국에 전파된 것은 대부분 그의 노력과 영향력에 크게 힘입었다.
라집의 아버지 구마라염은 인도 사람으로, 대대로 재상의 지위를 누린 가문이었으나, 출가한 후 龜玆로 가서 그 나라의 國師가 되었고, 왕의 여동생 기바와 결혼하여 구마라집을 낳았다. 중국 카슈가르에서 소승불교를 공부하다가 수리아사마라고 하는 대승불교도에 의하여 불교의 중관학파로 개종했다. 인도에 유학하면서 두루 여러 선지식을 참례하여 여러 방면에 대해 잘 알았고, 특히 기억력이 뛰어나 인도 전역에 그의 명성이 자자했다. 라집은 7세에 출가하여 경을 배워 날마다 1,000게송을 암송하였고, 9세에 출가한 어머니를 따라 계빈으로 가서 이 나라 왕의 사촌동생이며 설일체유부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은 대학자 반두달다의 제자가 되어 여러 경전들을 배웠다.
▲사리탑 탑신부와 상륜부
▲사리탑 옥개부
▲사리탑 기단부
그의 명성을 들은 왕이 그를 궁중에 초청하여 외도의 논사와 논쟁하게 하였는데, 라집은 외도를 굴복시킴으로써 국왕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12세에 어머니와 함께 계빈을 떠나 구자로 돌아가는 도중 월씨국의 북산을 지나는 길에 어떤 나한을 만났는데, 그가 라집이 만약 35세 까지 파계하지 않는다면 불법을 크게 일으켜 중생을 구제하고 아쇼카왕의 귀의를 받은 구파국다와 같은 고승이 될 것이고, 파계한다면 재능있고 총명한 법사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다시 그는 소륵에 일년동안 머물렀는데 여기에서 유명한 佛鉢신앙의 설화를 남겼다. 이 설화란 어린 라집이 佛鉢을 머리에 이고 왜 이렇게 가벼울까라는 생각을 하자 갑자기 무거워져 얼른 내려놓고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니, 그 말을 들은 어머니가 불발이 가벼웠다가 무거워진 것이 아니고 마음에 가벼움과 무거움의 분별이 있어서 발우의 가벼움과 무거움이 생겨난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사리탑 상륜부
▲사리탑 문비
▲사리탑 문비
또한 『아비담』,『육족론』,『증일아함경』등을 독송하여 그 뜻을 통달하였고 이 밖에 인도 고전을 비롯하여 여러 방면의 학문을 배웠고, 음양, 천문학 등에도 능통하여 길흉을 점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며, 다시 대승불교에 정통하였던 수리야소마를 스승으로 삼음으로써 비로소 대승교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어서 『중론』 『백론』등을 공부하였다. 다시 구자로 돌아가던 중 온숙국에서 당시 명성을 떨치던 道士와 논쟁하여 굴복시키자 명성이 사방에 퍼졌고 구자왕은 몸소 온숙에 가서 라집을 모셔왔다. 20세에는 비마라차에게서 『십송율』을 배웠다고 한다.
인도로 돌아가려는 어머니에게 이 땅에 남아서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행보다는 사람을 구제하는 일을 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구자의 新寺에 머물며 『방광반야경』을 입수하여 공부하기 시작해서 마침내 모든 대승경전에 두루 통달하였다. 라집이 일찍이 소승교를 배운 옛 스승 반두달다는 구자의 라집에게 찾아와 라집과의 계속된 문답을 통하여 라집의 교학이 올바르고 심원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라집은 나의 대 스승이요, 나는 라집의 소승 스승이다’ 라고 하면서 탄복하였다고 한다. 이 때부터 대승학자로서 라집의 명성은 서역 전역과 중국에 까지 널리 알려졌다.
▲사리탑 명문
姚秦三藏法師鳩摩羅什舍利塔
▲사리탑 조각
▲사리탑 명문
당시 관중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전진왕 부견이 그의 명성을 듣고 382년에 장군 여광에게 구자를 정벌하여 왕실을 멸하고 라집을 데려 오도록 하였다. 여광은 구자를 멸하고 라집을 데리고 오던 중 부견이 요장에게 살해되고 전진이 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양주를 평정하고 후량국을 건설하여, 라집도 16-17년을 그 곳에 머물렀다. 여광이 불교신자가 아니었던 까닭에 불교연구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후에 후진시대 요흥이 후량을 토벌하고 라집을 장안으로 맞아들인 때가 401년 12월 20일이다. 도안을 숭배했던 전진왕 부견의 뒤를 이어받아 삼보를 존숭한 요흥은 국사의 예를 갖추어 라집을 맞이하였다.
402년 정월부터 소요원의 서명각에서 僧肇, 승엄 등을 비롯한 여러 제자와 함께 경론을 한역하였고, 406년에는 長安大寺로 옮겨 번역을 계속하였다.10여년 간 전력을 다하여 경론을 한역, 강설 등에 종사하면서 문하에 수천의 영재를 두고 교화하다가 413년 4월 13일 장안의 대사에서 나이 70으로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직전 그는 자신이 한역한 경론에 잘못이 없다면 화장한 후에도 혀만은 타지 않으리라 예언하였는데 화장할 때 실지로 오직 혀만이 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고장에서 여광에 의해 억지로 구자왕의 딸을 처로 맞이 하였고, 장안에서는 요흥으로부터 기녀 열명을 제공받았다고 하는 행적을 남기고 있기도 하다.
▲기단부조각
▲기단부조각
▲기단부조각
요진시대에는 왕실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불교가 흥성하던 시대였으며, 이러한 시류를 타고 많은 서역지방의 스님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역경 사업에 종사하였지만, 그 가운데 여러 외국어에 통달하고 불교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토대로 한 간결하고 유창한 번역으로 중국 역경사상에 새로운 획을 긋고 여러 제자에게 불교의 진수를 전수함으로써 중국불교의 새로운 장을 열었던 것은 구마라집의 공로이다.
라집이 이 기간동안 한역한 경전의 수를 『출삼장기집』에서는 35부 294권, 『개원석교록』에서는 74부 384권, 『역대삼보기』에서는 97부 425권이라고 하였는데, 어느 설을 따르든 300권 이상의 번역사업을 완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가 한역한 경전의 면모를 보면 『좌선삼매경』, 『아미타경』, 『사익범천소문경』, 『대품반야경』, 『대지도론』, 『백론』, 『십송률』, 『유마경』, 『법화경』, 『소품반야경』, 『중론』, 『십이문론』, 『성실론』등의 여러 경론과 전기류에 이르기 까지 그 범위가 광범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단부조각
▲기단부조각
▲기단부조각
저서로는 요흥을 위하여 지은 『실상론』 2권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존하지 않고, 다만 『광홍명집』권 18에 수록되어 있는 요흥과 라집의 문답을 통하여 그 내용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고승전』에는 『유마경주』라는 저술이 있었다고 하지만 남아있지 않다. 다만 현존하는 승조의 『주유마힐경』에 라집의 주석이 포함되어 있는데, 라집이 406년 『유마경』을 한역하고 강의했을때 승조가 라집의 말을 받아적어 이것에 근거하여 주석을 한 것이므로 이 책의 내용은 라집의 사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라집이 일생동안 가장 힘을 기울인 것은 반야계통의 대승경전과 용수, 제바 계통의 중관부 논서의 번역으로 인도 중관불교와 주요한 대승경전을 최대의 공로자였다. 구마라집의 역출경전과 그의 문하에서 수학한 많은 제자들은 이후중국불교의 흐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 이루어진 한역은 크게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玄奘에 의해 이루어진 한역을 新譯시대, 구마라집에 의해 이루어진 한역을 舊譯시대, 구마라집 이전 후한시대 안세고, 지루가참, 축법호 등에 의해 이루어진 한역을 古譯시대라고 한다. 구마라집은 고역시대의 한역문이 지니고 있는 오류를 간파하고 정확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재번역하면서 동시에 이전에 소개되지 않은 방대하고 다양한 대승경론을 번역함으로써 이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문하에 僧肇, 道生 등 중국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다진 대표적인 사상가들을 배출함으로써 중국불교를 격의불교의 시대에서 벗어나 철학적인 불교로 심화시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여, 단순히 번역가의 차원을 벗어나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하였다.
▲안내문
<2009.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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