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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부도비

蔥叟 2009. 6. 3. 07:58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 부도비

  

   일연스님의 비문은 왕희지체를 집자하여 새긴 것인데 그 글씨체가 유명하여 중국에서도 많은 탁본을 요구했으며 필사본도 많이 남아 있다. 따라서 비록 비는 깨어졌지만 완벽하게 판독이 가능한 것이다. 비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곳을 지나면서 비문에 불을 질러 비를 녹이고 물을 뿌려 탁본을 해갔다. 이러한 일이 수없이 반복되자 인각사 스님들도 탁본 노역에 지쳐있었다. 또한 18세기에 고증학이 대두하면서 금석문에 관심이 고조되었고 급기야 고관들 사이에 비문을 탁본하는 것이 큰 취미가 되;었다. 경주 부윤을 지낸 이계 홍양호가 비문을 보러왔다가 비가 보이지 않아 스님들게 물으니 비는 깨어져 마루 밑에 넣어 숨겨두었다고 한다. 다행히 완전할 때의 탁본이 남아 있음에 감사할 뿐이다. 

 

   서지학자였던 박영돈씨는 일연스님에 관한 신문을 보고 노모를 극진히 보신 것에 감동하여 퇴직금으로 일연스님의 비문 탁본을 모두 구입해 두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전문이 완성되었으니 한 개인의 노력이 역사를 복원한 좋은 예라 할 것이다.  보각국사비는 보각국사 일연(1206-1289)이 죽자 왕명에 의해 그 일대기를 담아 제작한 고려시대 석비로, 고려 충렬왕 21년(1259) 그의 문인(門人)인 청분(淸분<王+分>)이 세웠다. 비문은 왕명을 받들어 당시 저명한 문장가 민지(閔漬)가 지었고 왕희지 글씨를 집자(集字)해 만들었다. 왕희지체이기 때문에 중국에도 그 존재가 알려졌으며, 이런 유명세에 힘입어 조선을 찾은 중국 사신이 탁본을 떠가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크게 훼손된 데다 그 뒤에도 무절제한 탁본이 이어져 비는 심각하게 마멸되고 지금은 일부 조각만 남아있는 실정이다.

 

   일연스님 탄신 800주년이었던 2006년, 보각국사 일연선사비가 그가  생전에 주석한 경북 군위군 인각사(麟角寺)에 복원, 제막되었다. 문화재청 지원을 받아 군위군과 인각사가 추진한 비 복원 사업은 일연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다는 뜻도 담았다. 복원 비에는 전면 2천395자, 뒷면 1천670자의 총 4천65자를 새겨넣었다. 복원비는 비신 기준 높이 2m35㎝, 너비 1m70㎝, 두께 30㎝. 비문 복원은 보각국사비 연구에 헌신한 서지학자 박영돈(71) 씨를 중심으로  그동안 국내외 학자들이 축적한 30여 종에 이르는 탁본을 비교 대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보각국사 부도비

 

▲보각국사 부도비

 

▲보각국사 부도비

 

▲비각

 

▲복원비

 

▲복원비문

 

▲복원비문

 

 

 

                                                                              <2009.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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