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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흥덕왕릉(興德王陵)

蔥叟 2009. 5. 15. 08:28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흥덕왕릉(興德王陵)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면석과 난간석이 둘러진 왕릉으로 부근에서 흥덕왕릉 비편이 발견되어 흥덕왕릉임이 증명되었다. 원성왕릉으로 알려진 괘릉에서 완성된 신라의 능묘제도가 다시 한번 재현되고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막을 내리는 마지막 왕릉이다. 화표석이 좌우에 있으나 돌출부분이 사라졌고, 석인상도 형식화하여 조각에 더 이상 긴장감이 사라졌다. 호인상의 주머니에 곡도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왕릉 주위로 4구의 사자상을 배치하였는데 그중 동쪽 사자상에 '王'자가 새겨진 목걸이를 한 것도 특색이다. 상석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뒷면이 완전하게 남아있어 복원하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제42대 흥덕왕은 선왕인 제41대 헌덕왕(憲德王)의 친동생으로서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조카인 제40대 애장왕(哀莊王)을 죽이고 형인 헌덕왕의 뒤를 이어 만년에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즉위 초에 왕비인 장화왕비가 세상을 떠나고. 신하들의 간곡한 청에도 불구하고 독신으로 지내고 있었다.  죽기 직전에 박씨 부인을 왕비로 들이나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다. 죽으면서 장화부인의 능에 합장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흥덕왕과 장화왕비 사이의 깊은 사랑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살펴보자. 그리고 흥덕왕릉의 장지에 관한 기록도 함께 살펴보자.

 

○<興德王>立. 諱<秀宗>, 後改爲<景徽>. <憲德王>同母弟也. 冬十二月, 妃<章和>夫人卒, 追封爲<定穆王后>. 王思不能忘, 悵然不樂. 群臣表, 請再納妃. 王曰: “隻鳥有喪匹之悲, 况失良匹, 何忍無情遽再娶乎?” 遂不從, 亦不親近女侍. 左右使令, 唯宦竪而己.[<章和>, 姓<金>氏, <昭聖王>之女也.]


흥덕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름은 수종이지만, 그 후에 경휘로 바꾸었다. 그는 헌덕왕의 동복 아우이다. 겨울 12월, 왕비 장화부인이 사망하자, 정목왕후로 추봉하였다. 왕은 왕비를 잊지 못하고 슬퍼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표문을 올려 다시 왕비를 맞아 들이기를 요청하였다. 왕이 말했다. “짝을 잃은 새에게도 자기의 짝을 잃은 슬픔이 있는데, 좋은 배필을 잃고나서 어찌하여 무정스럽게도 바로 다시 부인을 얻겠는가?” 왕은 끝내 요청을 듣지 않고, 시녀들조차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좌우의 심부름꾼은 오직 내시 뿐이었다.[장화의 성은 김씨이고, 소성왕의 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전>

 

제42대 흥덕대왕은 보력 2년 병오(826)에 즉위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떤 이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 한 쌍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얼마 안가 암놈이 죽으므로 홀로 남게된 수놈이 슬피 울기를 그치지 않았다. 이에 왕은 사람을 시켜 그 앞 에 거울을 걸어 놓도록 했다. 새는 거울 속의 그림자를 보고 제 짝을 얻은 줄 알고 그 거울을 쪼다가 제 그림자인 것을 깨닫고 슬피 울다 죽었다. 이에 왕이 노래를 지었다 하나 가사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 '흥덕왕와 앵무새'조>

 

○十一年, 冬十二月, 王薨. 諡曰<興德>, 朝廷以遺言, 合葬<章和王妃>之陵.

 

11년 겨울 12월,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흥덕이라 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의 유언에 따라 장화왕비의 능에 합장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전>

  

陵在安康北比火壤 妃昌花合葬.

능은 안강 북쪽 비화양에 있는데 장화비와 합장하였다.

 

                                                                                                                       <삼국유사 왕력>

 

   경덕왕은 효성이 지극하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부부금슬이 좋기로는 흥덕왕을 들 수 있다. 지금도 왕릉의 상석 뒷면을 문지르면 흥덕왕과 장화왕후와 같이 부부 금슬이 좋아진다는 민간신앙이 전해져 반들반들하게 문지른 흔적이 남아있다. 장화왕비의 능은 흥덕왕 생전에 직접 만들었다. 즉 왕비가 먼저 죽으면 왕비릉을 만든다는 정보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왕경에서 멀리 덜어진 이곳 안강까지 와서 왕릉을 축조하엿는지 궁금하다. 정치적 연고인지, 안강의 진골귀족과 장화왕비와의 관련이 있었는지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다.

 

   흥덕왕릉은 통일신라의 왕릉으로서 막을 내리는 마지막 능이다. 흥덕왕릉 이후에는 더이상 화려한 능묘가 등장하지 않고 간소화되는 경을 띤다. 흥덕왕이 사망한 후에 사촌 계열에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 피비린내 나는 싸움 끝에 왕위에 오른 43대 희강왕은 2년만에 자신의 신하인 김명에게 살해당하고 44대 민애왕이 된 김명 역시 즉위 3년만에 45대 신무왕인 김우징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이처럼 2~3년을 주기로 왕권쟁탈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선왕의 왕릉을 단장할 겨를이 없었을 뿐더러 정치적 역량도 왕릉을 축조할 능력도 없었다고 보여진다.

 

▲흥덕왕릉(興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흥덕왕릉(興德王陵)

 

▲상석

 

▲석인상

 

▲석인상

 

▲호인상

 

▲호인상

 

▲호인상

 

▲호인상

 

▲석인상

 

▲석인상

 

▲석인상

 

▲석인상

 

▲석인상

 

▲화표석

 

▲석사자상

 

▲석사자상

 

▲석사자상

 

▲석사자상

 

▲십이지신상(용)

 

▲십이지신상(뱀)

 

▲십이지신상(말)

 

▲십이지신상(양)

 

 

 

                                                                               <2009. 5.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