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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경덕왕릉(傳景德王陵)

蔥叟 2009. 5. 13. 08:12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경덕왕릉(傳景德王陵)

  

신라 제35대 경덕왕은 통일신라시대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이며 문화적으로 가장 전성기이며 최고로 전제왕권이 확립되었던 시기의 임금이다. 우선 전경덕왕릉 앞에 서면 경덕왕릉일 가능성이 높은 전김유신묘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난간석을 두르고 12지가 새겨진 탱석이 돌려진 봉분이 그러하고 그외에 석인상이나 석사자상, 화표석 등의 석물 배치도 없다. 또한 언덕위에 자리잡은 위치도 비슷하다. 경덕왕의 능으로 알려진 이 무덤은 영조 때까지는 이름 없는 무덤이었으나 1730년대 경주 김씨가 족보를 제작하게 되면서 일반적인 무덤보다 규모가 크고 장식이 있는 무덤을 왕릉으로 지정하면서 경덕왕릉으로 지정되었다. 이대 경주김씨 문중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참고하면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만 취하였다.

 

○二十四年, 六月, 流星犯心. 是月, 王薨. 諡曰<景德>, 葬<毛祇寺>西岑.

24년 6월, 유성이 심성을 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경덕왕 24년조>

 

初葬頃只寺西岑鍊石爲陵移葬楊長谷中.

처음에는 경지사 서쪽 봉우리에 장사를 하여 돌을 깎아 능을 만들었더니  뒤에 양장곡 가운데로 옮겨 장사하였다.

 

                                                                                                                         <삼국유사 왕력>

 

즉, 오직 언덕 잠(岑)자라는 한 글자에 맞춰서 경덕왕릉으로 지정한 것뿐이다. 그러나 현재의 능 동쪽에는 어떠한 절터도 발견되지 않았다. 한편 강우방은 십이지신상 조각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반의 조각으로 원성왕 바로 이후, 능지탑 보다는 조금 앞서 제작된 조각이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따라서 이 능은 원성왕의 아들인 소성왕릉이 아닌가 여겨진다. 하지만 소성왕에 관하여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장지에 관한여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二年, 六月, 封王子爲太子. 王薨, 諡曰<昭聖>.

2년 6월, 왕자를 태자로 봉하였다.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소성이라 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성왕전>

 

한편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강인구 선생은 남산 동록의 전헌강왕릉을 경덕왕릉으로 비정한 바 있는데 이는 신라시대의 능묘제도 발달 모습에 비추어 볼 때 납득하기 어렵다. 신라의 능묘는 발달하는 과정과 쇠퇴해 가는 과정이 너무나 흡사하여 성덕왕릉에서 시작하여 경덕왕, 원성왕, 소성왕, 애장왕, 헌덕왕, 흥덕왕까지의 왕릉은 능 주위에 호석을 두르고 바깥쪽에는 돌기둥 40개를 세워 돌난간을 세우고 기둥사이에는 돌살대를 끼우는 형식의 인도의 산치대탑을 모방한 모습을 보인다.

 

신라인들은 왕릉을 건립할 때 풍수와는 상관없이 장지(葬地)를 결정하였다. 신라인 나름대로의 독특한 지리관(地理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인들은 주로 낮은 지역 내지 평지를 장지로 택한 것 같아 보인다. 문무왕 대에서 원성왕 대까지는 주로 경주에서 울산을 잇는 방향에 왕릉이 있었으나 경덕왕만은 예외의 경우에 속한다.

 

▲전경덕왕릉 가는 길

  

▲전경덕왕릉

 

▲전경덕왕릉

  

▲봉분

  

▲봉분

  

▲전경덕왕릉

  

▲전경덕왕릉

     

▲십이지신상(용)

  

▲십이지신상(뱀)

  

▲십이지신상(양)

  

▲십이지신상(원숭이)

   

▲십이지신상(개)

  

▲십이지신상(돼지)

 

 

 

                                                                                <2009.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