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원성왕릉(元聖王陵)
이곳은 원래 숭복사의 전신인 곡사(鵠寺)가 있었던 절터였다. 통일신라를 지나 고려시대 500년간 이곳은 잊혀진 곳이었다. 고려시대 경주지역의 사정은 현재 잘 알지 못하고 있다. 단지 고려사 열전 이의민조에 의하면 경주는 반란이 많이 일어났던 곳, 아름답지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난 곳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며 유적, 특히 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경주의 사정은 간접 자료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사찰을 비롯한 유적지들도 재정적(財政的)으로 운영이 불가능하여 폐사된 곳도 많았던 것 같다. 조선 초기의 경주지역 자료인 경상도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세종장헌대왕실록지리지 등에도 신라시대의 절 이름이 모두 사라졌으며 왕릉 또한 30~40기가 되지만 10기만이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괘릉입구 바위
▲괘릉입구 바위
▲바위 명문
報國金舜經(보국김순경):나라를 위한 김순경
貢銀四萬餘(공은사만여):은전 4만여(냥)을 바쳤으니
特封公侯爵(특봉공후작):특별히 공후작(公侯爵)으로 봉작하고
仍命表忠閭(잉명표충려):이에 명하여 마을에 충성한 것을 표하노라.
괘릉은 경주에 있는 신라시대의 왕릉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완비된 능묘제도를 간직한 왕릉이다. 하지만 이 왕릉에 대한 기록마저 사라지고 없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시대의 경주에서 울산을 잇는 교통로는 토함산의 서쪽 기슭을 끼면서 발달되었고 유적지도 교통로에 인접하였다. 조선 초기의 재상이었던 하륜(河崙)이 경주 부윤(府尹)으로 있을 당시에는 이곳의 교통로가 거의 파괴되어 있어 하륜이 울산으로 가는 길에 민가도 없어 숲속에서 짐승을 피했다고 한다. 이때 사천왕사의 연상스님은 경주-울산 사이에 원(院)을 세우고 싶다고 하였다. 그후 원이 완공되었을 때에 하륜이 다시 경주에 와서 연상스님과 사천왕사에서 만나 원의 이름을 지었는데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물건에게 이로움을 준다는 의미의 혜리원(惠利院)이라고 지어주었다. 이때 경주-울산간의 교통로는 토함산 서쪽 통로가 아니고 남산 동쪽 기슭을 타는 통로였다.
그후 임진왜란 당시에 가등청정의 침입로가 바로 이 길이었는데 경주 읍성과 안강 지역에서 의병활동이 활발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1669년에 간행된 『동경잡기』에 처음으로 괘릉의 존재가 기록되어있는데 이때는 이미 주인을 잃은 왕릉이었다.
「괘릉(掛陵)은 경주부 동쪽 35리에 있는데 어느 왕의 능인지 알지 못한다(不知何王陵). 전설에 의하면 수중에 장사하고 관을 돌 위에 걸어 두었다가 여기에 흙을 쌓아 능을 만든 까닭에 괘릉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동경잡기 능묘조>
▲괘릉 전경
▲괘릉 봉분
▲괘릉 봉분
앞서 언급한 경상도 지리지, 경상도 속찬 지리지, 세종장헌대왕실록 지리지 등의 서적들은 국가에서 펴낸 국가적인 사업이었는데 국가적인 사업에서 괘릉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은 당시에 몰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시 경주 김씨들은 왕릉에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후 1730년 왕릉을 세로 정하면서 『삼국사기』에와 『삼국유사』의 두 기록 가운데, 삼국사기의 기록에만 근거하고 삼국유사의 기록은 완전히 무시한 채, 왕릉이 매우 화려하며, 화장한 문무왕의 능이 물과 관련이 있다는 점만을 부각시켜 이곳을 문무왕릉으로 비정하고 비석까지 세웠다. 비록 문무왕릉이 동해에 있지만 최소한 허릉(虛陵)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경주 김씨들은 이곳에서 문무왕에 대한 제사를 지냈고, 경주 김씨 이외에는 대왕암에서 제사를 지내는 촌극(寸劇)이 일어났던 것이다.
○十四年, 冬十二月二十九日, 王薨. 諡曰<元聖>, 以遺命擧柩燒於<奉德寺>南
14년 겨울 12월 29일,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원성이라 하고, 유언에 따라 관을 봉덕사 남쪽에 옮겨 화장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원성왕전>
○陵在鵠寺 今崇福寺 有也崔致遠所立碑.
능은 곡사에 있는데 지금의 숭복사이며 최치원이 찬한 비석이 있다.
<삼국유사 왕력>
○王之陵在吐含岳西洞鵠寺(今崇福寺)有崔致遠撰碑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지금의 숭복사)에 있는데 최치원의 지은 비가 있다.
<삼국유사 원성대왕조>
▲화표석
▲석인상
▲석인상(뒤)
▲석인상 상호
당시만 하더라도 조선왕조의 폐불 정책에 따라 삼국유사의 기록은 철저히 무시당했고 삼국유사의 기록에 있는 원성왕릉을 찾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시대까지도 괘릉은 문무왕릉으로 전해져 오다가 1930년대에 입실소학교에서 말방리 절터로 소풍을 갔다가 탑 사이에서 비편을 수습하였다. 당시 총복부박물관 경주분관에 보관되어있던 '조선금석총람'과 자세히 대조하면서 말방리 절터는 바로 숭복사터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한 금석문에는 괘릉이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잇어 괘릉이 원성왕릉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경주 김씨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버텨오다가 1968년 5월 신라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해 대왕암이 문무왕릉으로 밝혀졌고 이것이 한국일보에 대서특필됨으로서 경주 김씨들도 백기를 들고 괘릉에 세워졌던 문무왕릉비를 뽑아냈다. 이처럼 시대마다 문중의 이해관계에 따라 왕릉이 뒤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괘릉과 곡사에 관한 숭복사비의 기록을 검토해보자.
▲석인상
▲석인상 상호
금성의 남쪽 해돋이를 볼 수 있는 산기슭에 崇福寺라는 절이 있사오니 이 절은 곧 先代王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신 첫해에 烈祖 元聖大王의 능을 모시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옛절이 생긴 기원을 상고하고 새 절이 이룩된 것을 살펴보건대, 옛날 파진찬 金元良은 炤文王后의 외숙이요 肅貞王后의 외조부로서, 몸은 귀공자였으나 마음은 참다운 옛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謝安이 東山에서 마음껏 즐기듯이 歌堂과 舞館을 어엿하게 짓더니 나중에는 慧遠이 여럿이 함께 西方淨土에 가기를 기약한 것처럼 그를 희사하여 佛殿과 經臺로 삼아, 예전에 피리 금슬 소리이던 것이 오늘날 金鐘 玉磬 소이가 되었으니 시절이 변함에 따라 고쳐진 것으로 俗界를 벗어난 인연이었습니다. 절의 의지가 되는 것은 바위의 고니 모양인데 그로 인해 절 이름을 삼았습니다. 좌우의 翼廊으로 하여금 길이 값지게 하고 佛殿으로 하여금 길이 빛나게 하였으니, 저 波羅越의 형상과 崛恡遮의 이름으로 어찌 한 번에 천리를 나는 고니로써 비유하고 沙羅雙樹가 변한 것으로 이름을 지은 것과 같겠습니까. 다만 이 땅은 위세가 鷲頭山보다 낮고 地德이 龍耳보다 뫂으니 절을 짓느니보다는 마땅히 왕릉을 마련해야 할 것입니다.
貞元 무인년(798) 겨울에 (元聖大王께서) 장례에 대해 遺敎하시면서 因山을 명하셨는데 땅을 가리기가 더욱 어려워 이에 절을 지목하여 幽宅을 모시고자 하였습니다. 이때 의문을 가진 이가 말하기를, “옛날 子遊의 사당과 孔子의 집도 모두 차마 헐지 못하여 사람들이 지금껏 칭송하거늘 절을 빼앗으려는 것은 곧 須達多長者가 크게 희사한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사지내는 것이란 땅으로서는 돕는 바이나 하늘로서는 허물하는 바이니 서로 補益되지 못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담당자가 비난하여 말하기를, “절이란 자리하는 곳마다 반드시 교화되며 어디를 가든지 어울리지 않음이 없어 재앙의 터를 능히 福된 마당으로 만들어 한없는 세월 동안 위태로운 세속을 구제하는 것이다 무덤이란 아래로는 地脈을 가리고 위로는 天心을 헤아려 반드시 묘지에 四象을 포괄함으로써 천만대 후손에 미칠 경사를 보전하는 것이니 이는 자연의 이치이다. 불법은 머무르는 모양이 없고 禮에는 이루는 때가 있으니 땅을 바꾸어 자리함이 하늘의 이치에 따르는 것이다. 다만 靑烏子와 같이 땅을 잘 고를 수만 있다면 어찌 절이 헐리는 것을 슬퍼하겠는가. 또 이 절을 조사해보니 본래 왕의 인척에게 속하던 것인바 진실로 낮음을 버리고 높은 데로 나아가며 옛것을 버리고 새것을 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왕릉으로 하여금 나라의 雄麗한 곳이 자리잡도록 하고 절로 하여금 경치의 아름다움을 차지하게 하면 우리 왕실의 복이 산처럼 뫂이 솟을 것이요 저 侯門의 덕이 바다같이 순탄하게 흐를 것이다. 이는 ‘알고는 하지 않음이 없고 각각 그 자리를 얻음이다’고 할 수 있으니, 어찌 鄭나라 子産의 작은 은혜와 漢나라 魯恭王이 도중에 그만둔 것과 더불어 견주어 옳고 그름을 따지겠는가. 마땅히 점괘에 들어맞는 말을 듣게 된다면 龍神이 기뻐함을 보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드디어 절을 옮기고 이에 왕릉을 營造하니 주 役事에 사람이 모여 온갖 匠人들이 일을 마쳤습니다.
<대숭복사비>
▲석인상
▲석인상(뒤)
▲석인상 상호
고운 최치원에 의하면 이곳에 곡사(鵠寺)가 있었고 바위 모양이 고니를 닮아서 곡사라고 불렀다고 하였다. 따라서 명당으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로 치면 국립국악원과 같은 가당무관(歌堂舞館)을 이곳에 지었다고 한다. 석가모니께서 열반에 든 인도의 쿠시나가르에는 사라수가 있었다. 그곳을 곡림(鵠林)이라 하는데 곡사는 곧 곡림일 가능성이 높다. 즉 석가모니가 열반한 상징적 의미를 지닌 극락세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가히 왕이 묻힐만한 곳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왕도 절을 빼앗을 수는 없는 일이기에 원성왕은 곡사를 장지로 삼기를 포기하려는데 북교는 흉한 것도 길한 것으로 바꾸는 종교인데 절을 매입하여 현재의 숭복사로 옮기고 이곳에 왕릉을 조영하였다. 그리고 곡사는 헌강왕 대에 이르러 숭복사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석인상
▲석인상 상호
▲석인상(뒤)
괘릉의 입구에 처음 나타나는 석조물은 바로 화표석이다. 화사석은 고려 왕건릉에서도 등장하는데 민간 묘에서도 받아들여 망주석으로 정착하게 된다. 신라 능묘에는 이곳 괘릉과 흥덕왕릉에만 남아있다. 괘릉의 화사석은 윗부분에 볼록하게 조각한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 위에 다른 조각이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화표석의 기원은 인도의 아소카왕 석주에서 찾을 수 있다. 그후 중국 남조의 황제릉에 2개의 화표석을 세웠다. 본래 화표석 위에는 동물이 배치되어 있었다. 화표석은 무덤의 경게 역할을 한다.
화표석 안쪽에는 이국적인 호인상이 서 있는데 몽둥이를 들고 평복을 입고 머리에는 터번을 두르고 있는데 지금까지는 중국에 와 있던 서역의 무역상으로 보아왔다. 그런데 80년 이후 권영필교수는 위그르인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정수일(무하마드 깐수) 교수는 <신라,서역 교류사>에서 아랍인이라고 주장하였으며, 경주박물관의 민병훈 학예관은 중앙아시아를 거점으로 하여 중국 장안에서 무역을 독점하던 소그드인(Soghd)이라고 주장하는 등 민족 이름까지 거명되고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에 대하여서도 울산 호족의 자제라는 설과 아랍 무역상인이라는 설이 있는데 삼국사기에는 아랍과 신라가 직거래로 무역을 하였으며 그때 교류한 물품의 목록이 나와 있어 무역선이 난파당하여 살아남은 아랍상인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어쨌든 이 호인상은 무역에 종사하던 사람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석사자상
▲석사자상
▲석사자상
▲석사자상
호인상이 아랍인 또는 서역인, 소그드인 등으로 불리는 것은 신라의 국제적 위상에 대한 연관성이 있으며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후에 궁궐에 서역인을 두고 신변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때부터 무덤 속에 명기를 넣는 풍습이 등장하였다. 이는 명기가 바로 왕실을 지켜준다는 의미를 지녔다고 한다. 호인상의 허리춤에는 복주머니가 달려있는데 이는서역인들이 왕실에 들어와 경제관료로 활동하였으니 바로 산낭(주산)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호인상의 안쪽에는 문인석이 서 있는데 앞에는 평복을 입고 뒤에는 양당개란 갑옷을 입고 칼을 지니고 있어 앞면은 문인 뒷면은 무인을 나타내고 있다. 즉 문무인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문무인상의 관에는 용감무상한 곤충으로 유명한 벌이 그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장군의 관직명 앞에 벌 봉(蜂)자를 섰다고 한다. 문무인석은 구렛나룻이 덥수룩하고 카이젤 수염을 한 모습인데 이로 미루어 용병으로 유명한 위구르인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십이지신상(뱀)
▲십이지신상(말)
▲십이지신상(양)
문무인석 안쪽으로 좌우에 두기씩 모두 4기의 석사자가 머리의 방향을 동서남북을 향하고 서 있다. 일부에서는 성덕왕릉에는 석사자 안에 문무인석이 있다는 점을 들어 원래는 능 주위에 있었던 것을 옮겨놓았다는 주장이 있지만 봉분 주변에는 석사자를 배치할 만한 공간이 없어 원래 자리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사자 역시 그 기원은 인도였다. 중국 황제릉에서 이를 받아들였고 역시 신라도 채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성덕왕릉에 있던 삼각형 받침돌은 이곳에서는 사라지고 없다. 이는 호석을 쌓는 기술이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십이지신상도 부조로 조각하였으며 성덕왕릉에서는 모두가 정면상이지만 이곳에서는 동서남북 면의 상만이 정면 상이고 나머지 상은 모두 정면상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십이지신상(원숭이)
▲십이지신상(닭)
<2009.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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