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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김유신묘(傳金庾信墓)

蔥叟 2009. 5. 11. 12:26

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전김유신묘(傳金庾信墓)

 

   이 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김유신장군 묘에 대한 위치를 서로 상반되게 기록한 이래 일제시대 일인 학자들, 해방 후에는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연스님 이후 이 능에 대한 논쟁의 첫 제기자는 경주고적에 대한 현대적인 첫 조사자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인 학자 관야정 박사였는데, 여기에 반대하여 김유신의 무덤이 틀림없다고 역설한 이는 신라사 개척에 공이 많았던 금서룡박사였다.

 

▲전김유신묘

 

▲전김유신묘
 

   그 이후 1968년 가을 우리나라 사학계의 태두였던 이병도박사가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장군의 묘가 잘못 전해져 왔다는 새로운 학설을 발표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이박사의 주장에 즉각 반론을 펴고 나선 김상기박사 역시 사학계의 대학자여서 이 학술논전은 일반국민들로부터도 커다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이 논전은 사학계로서의 학문적인 쟁점의 제기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지만, 논쟁의 귀결에 따라서는 일반 국민들로서도 문화재위원회가 지정유적을 잘못 고증하는 바람에 엉뚱한 사적을 관람하는 셈이 되고, 특히 김해김씨 문중으로서는 조상묘를 잘못 모셔온 셈이 될런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 귀추가 주목되었다. 두 사람의 논쟁은 조선일보 1968. 9. 24 에 이박사가 인터뷰 형식을 빌어 '사적21호는 김유신 묘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기사화하면서 비롯되었다. 1천3백년의 풍상을 침묵 속에 지켜온 한 고분이 엄청난 논쟁의 회오리를 몰고 온 셈이었다.
  

▲전김유신묘

 

▲전김유신묘


   다년간 고증과 실측의 학적 고심끝에 얻은 이박사의 결론은 한마디로 지금까지 김유신묘로 전해진 묘는 신무왕릉이며, 무열왕릉 동편에 있는 김인문묘가 김유신의 묘이며 김인문묘는 이미 봉토가 허물어져 평지화 되어 그곳에 서악서원이 세워진 것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김씨의 반론은 이틀 후 같은 지상에 앙케이트 형식으로 소개되고 뒤이어 중앙일보 1968. 9. 28 자에 이박사의 주장은 50여년 전 일본인 관야정씨가 들추어낸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새삼 논의할 것이 없는 사실이라는 기자의 해설기사 형식으로 나타났다.

   같은 무렵 김해김씨 종친회는 앞으로도 사적21호에서 조상에 대한 제사를 계속하겠다고 발표하여 화제을 더 하였다. 당시 파리에서 열린 국제과학연맹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온 이박사는 김박사의 반론에 대한 몇가지 반증을 제시하면서 조선일보 1968. 9. 28 에서 다시 거듭 주장했다. 이어 조선일보에서는 국립박물관장 김재원박사 회갑기념 논문집에 싣기로 되어 있던 이박사의 논문을 편집위원장이었던 이숭녕박사의 양해를 얻어 1968. 11. 9 ~ 12.5 까지 7회에 걸쳐 연재함으로써 논쟁은 더욱더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김박사 역시 한국일보 지상을 통해 반론을 거듭 제기하였고, 1969년초에 '김유신묘의 이설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고고미술에 장편의 논문을 실었다. 양씨의 주장은 이 두 논문으로 일단 정리된 셈이지만 아직도 학계의 정설로서 정립되지 못한 채 사학계의 묵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편 경주지역에서는 1979년에 권오찬선생이 긍정론을 피력한바 있다. 

 

▲전김유신묘

  

▲전김유신묘

 

   서기 673년 7월 1일 김유신은 사망했다. 이때 문무왕은 친히 문상을 했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무열왕릉비에 이어 신라 역사상 두 번째의 비를 세우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군악대를 100여명을 동원하여 장례를 집행하고 금산원에 장사를 지냈다. 이를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咸寧> 四年癸酉 至秋七月一日, 薨于私第之正寢, 享年七十有九. 大王聞訃震慟, 贈賻彩帛一千匹․租二千石, 以供喪事, 給軍樂鼓吹一百人, 出葬于<金山>原, 命有司立碑, 以紀功名, 又定入民戶, 以守墓焉.

(함녕 4년 계유) 가을 7월 1일, 유신이 자기 집의 침실에서 죽으니 향년 79세였다. 대왕이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하게 생각하여 채색 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부의로 보내 상사에 쓰게 하고 군악의 고취수 1백 명을 보내 주었다. 금산원에 장사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비를 세워서 그의 공명을 기록하게 하였으며 또한 민호를 지정하여 무덤을 지키게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하> 

 

▲전김유신묘

 

▲전김유신묘

 

   그의 현손 김장청(金長淸)은 『김유신행록(金庾信行錄)』이라는 장군의 일대기 10권을 썼다. 그로부터 약 470여 년 후 서기 1145년  고려의 김부식은 김유신행록을 원전으로 하여 내용이 너무 번잡하고 윤색이 심하다고 생각하여 근거 있고 믿을만한 내용을 압축하여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을 3권으로 편찬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장군의 묘가 「금산원에 장사했다(葬于金山原)」고 기록하고 있다.

 

○<庾信>玄孫<新羅>執事郞<長淸>, 作行錄十卷, 行於世. 頗多釀辭, 故刪落之, 取其可書者, 爲之傳.

유신의 현손으로서 신라의 집사랑인 장청이 행록 10권을 지어 세상에 전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날조해 넣은 말이 아주 많기 때문에 이를 간추려 쓸 만한 것만을 취하여 전으로 삼는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하>

 

後, <興德大王>封公爲<興武大王>.

그 뒤에 흥덕대왕이 공을 흥무대왕에 봉했다.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 하>

 

   즉 김유신의 장지와 관련하여 삼국사기의 내용은 충분히 신빙성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삼국유사는 김유신의 장지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김유신묘

 

▲전김유신묘

 

▲전김유신묘

 

至五十四景明王, 追封公爲興*虎{武}大王, 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走峰.

 제 54대 경명왕 때에 공을 추봉하여 흥호(무)대왕이라 하였다. 능은 서산 모지사 북쪽, 동으로 향해 뻗은 봉우리에 있다.

 

                                                                                                                   <삼국유사 김유신조>

  

   이의 기록을 보면 「능은 모지사 북쪽의 동향한 봉우리에 있다(陵在西山毛只寺之北東向之峯)」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는 42대 흥덕왕 때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고, 삼국유사에는 54대 경명왕 때에 추봉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이때 신분상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김유신묘는 신라 멸망이후에 김해 김씨에 의해 관리되지 않았으며 이것은 왕릉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문중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또한 고려왕조에서 허락도 하지 않았다. 삼국유사는 1300년대, 즉 신라 멸망 후 400년이 지난 후에 쓰여지면서 왜곡된 기록이며 조선시대의 기록도 이를 근거로 기록되었다. 1730년 경주부윤이었던 남지훈에 의해서 비가 세워졌고  지금까지도 삼국유사를 믿고 있는 실정이다. 즉 삼국사기에 금산원, 즉 들판에 있었던 김유신묘가 고려시대 이후 봉우리로 왜곡되었으며 김해김시들은 삼국유사의 '동햐주봉'이라는 기록에 근거하여 현재의 묘로 비정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김유신의 묘에 관한 기록이 상반되고 있지만 삼국사기의 기록이 더 정확한 기록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의 후손이 직접 기록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전김유신묘비

  

▲전김유신묘비문

 

   1973년 당시 경주박물관의 학예사로 근무하던 강우방선생은 십이지신상의 조각의 양식을 연구한 결과 김유신 당시인 673년경의 조각이 아니라 약 100년 뒤인 35대 경덕왕 때의 조각양식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또한 왕릉의 양식도 김유신당시의 것은 아니고 33대 성덕왕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므로 강우방 선생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에서 주장하는 흥덕왕 당시에 흥무대왕으로 추봉되면서 무덤을 고쳤다는 주장도 있으나 십이지조각의 양식으로 볼 때 흥덕왕대의 조각양식도 아니기 때문에 이 주장에도 설득력은 약하다. 통일 이후 경주 김씨는 김해 김씨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김유신 사망 후에는 가야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는 성덕왕의 어전회의에서 신하들이 김유신의 후손을 감싼다고 왕에게 진언하기에 이르렀고 혜공왕 때에는 김유신의 직계후손이 역적죄로 처형당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관련된 삼국유사의 기록을 잠깐 읽어보자.

 

   제37대 혜공왕(惠恭王) 시대 대력(大曆) 14년 기미(779) 4월에 회오리바람이 갑자기 유신공의 무덤에서 일어났다. 회오리바람 속에 웬 사람 하나가 좋은 말을 탔는데 장군의 차림을 하였고 또한 갑옷 차림에 병장기를 가진 자 40여 명이 뒤를 따라오더니 죽현릉(미추왕릉)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왕릉 속에서 왁자지껄하고 웃음소리 같은 소리가 나는데 혹은 하소연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그 말소리에 “제가 살아서는 정치를 돕고 환란을 구제하고 나라를 통일한 공로를 세웠으며 지금 혼백이 되어서도 나라를 수호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환란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은 잠시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간 경술년에 제 자손이 죄 없이 사형을 당하였고 임금이나 신하들은 나의 공적을 생각하지 않으니 저는 멀리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 다시는 나라를 위하여 애써 근념(勤念)을 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데 왕은 허락하소서” 하였다.

 

   미추왕이 대답하기를, “오직 나와 그대가 이 나라를 수호하지 않는다면 저 백성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대는 이전과 다름없이 힘을 쓰오” 하였다 유신공은 세 번을 청하였으나 미추왕이 모두 허락하지 않으니, 회오리바람은 그만 돌아갔다.

 

   혜공왕은 이 이야기를 듣고 겁이 나서 즉시 대신 김경신(金敬信․뒤에 원성왕이 된다)을 보내어 김유신의 무덤에 가서 사과하고 공을 위하여 공덕보(功德寶) 밑천으로 밭 30결(結)을 취선사(鷲仙寺)에 들여놓아 그의 명복을 빌었다. 이 절은 김공이 평양을 친 후에 복을 닦기 위하여 세웠던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 미추왕 죽엽군(味鄒王竹葉軍)조>

 

▲십이지신상(용)

 

▲십이지신상(뱀)

 

이 이야기는 신라의 삼국통일 후 점차 김해 김씨가 도태되어가던 중 혜공왕 때 쿠데타를 일으켜 무열왕계에서 내물왕계로 왕권이 넘어간 후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에 추봉하고 무덤을 고쳤다는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기사이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가 무덤을 고치는 사회는 아니다. 특히 왕족인 경주 김씨가 신하인 김해 김씨의 무덤을 고쳐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더군다나 일개 신하의 무덤을 왕릉과 동일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강우방선생은 십이지신상의 양식을 분석한 결과 전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은 흥덕왕 때의 조각이 아니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전김유신묘의 형식은 12지신상이 새겨진 호석을 두르고 다시 주변으로 난간석을 돌렸다. 즉, 인도의 산치대탑과 같은 불탑에서 배워온 양식이다. 난간석은 골품제 사회에서 왕릉만이 두를 수 있는 것으로 왕즉불 사상의 상직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는 불교의 형식을 빌려 왕릉의 신성성을 극대화한 것이다. 엄격한 골품제가 유지되던 신라사회에서 신하의 묘가 왕릉과 같은 규모나 양식을 침범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물며 왕족이나 왕의 아버지조차도 사후에 왕 또는 갈문왕으로 추봉되었지만 무덤만은 왕릉의 형식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한편 조선시대 16세기에 구암 이정은 퇴게 이황에게 서찰을 보내어 김유신을 위하여 세원을 세울 것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는다. 이때 세워진 서원이 바로 서악서원이다. 현재 서악서원은 무열왕릉과 전김인문묘가 잇는 서악리에 위치한다. 제실은 본래 무덤 가까운 곳에 짓는 것이 일반적인 원칙이었다. 이는 당시까지만 하여도 전김인문묘가 김유신묘로 알려져 있었기에 그곳에 제실을 지었다는 것이다. 661년에 사망한 태종무열왕릉이 그처럼 소박한 모습인데 신하인 김유신묘가 이렇게 화려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십이지신상(말)

 

▲십이지신상(양)

 

한편 최완수 선생은 삼국사기 경덕왕릉의 장지에 관한 기록에 근거하여 전김유신묘를 경덕왕릉으로 비정하였다. 

 

○二十四年, 六月, 流星犯心. 是月, 王薨. 諡曰<景德>, 葬<毛祇寺>西岑.

24년 6월, 유성이 심성을 범하였다. 이 달에 왕이 별세하였다. 시호를 경덕이라 하고 모지사 서쪽 산에 장사지냈다.

 

                                                                                                           <삼국사기 경덕왕 24년조>

 

  현재 전김유신묘의 동쪽 산기슭에는 금산제라는 제실이 잇고 이곳에서 하반신만 남은 미륵반가사유상이 발견된 바도 있어 이곳이 모지사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렇다면 전김유신묘는 경덕왕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현재 전김유신묘에는 호석과 난간석 그리고 십이지신상이 있을 뿐 성덕왕릉이나 괘릉 등에 나타나는 화표석이나 석인상, 석사자상 등이 없다. 이는 최초로 십이지신상이 배치되었던 성덕왕릉을 제외하면 원래 없던 양식이엇던 것으로 보인다. 식인상과 석사자상등은 쿠데타로 집권한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 등에서 왕권의 정당성이 취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전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 조각은 8세기 최전성기의 조각으로 문목에 무기를 들고 좌향이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다. 이 조각은 성덕왕릉에서 환조의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구황동 왕릉터의 십이지신상에서 부조형태로 바뀐 후 전김유신묘로 이어져 원성왕릉, 전경덕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으로 조각의 맥이 이어 지고 있음을 볼 수 있어 십이지신상 조각의 편년을 통하여 왕릉을 부정해볼 수 잇는 귀중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십이지신상(원숭이)

 

 

 

                                                                                <2009.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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