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월성 해자(月城垓子)
신라 천년 왕성인 경주 월성(月城)은 언뜻 높낮이 차이가 거의 없는 경주 평야의 한 자리를 차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고도가 제일 높은 국립경주박물관 인접 동쪽 성벽 부근과 표고가 가장 낮은 맞은편 서쪽 성벽 끝 지점 높낮이 차이가 무려 18-19m에 이른다. 이런 지형은 고대 평지 성곽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성벽 바깥을 따라가면서 파서 갖추게 되는 대형 저수지와 같은 방어시설의 일종인 해자(垓子)를 만드는 데는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작용한다. 워낙 높낮이 차이가 큰 까닭에 항상 깊은 물이 고여 있어야만 하는 해자를 조성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기 때문이다.
▲월성해자 전경
▲월성해자(池)
월성은 이런 난점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2년 동안 실시한 월성 제4호 해자에 대한 발굴조사를 한 결과, 그 이전 다른 해자 조사에서 밝혀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다단계식 해자'를 축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즉, 요즘도 산간 농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계단식 논'과 같은 모양으로 여러 해자를 만들어 이를 이어붙인 것으로 밝혀졌다. 해자끼리는 물이 흐르는 '물꼬'와도 같은 수로로 연결됐으며, 따라서 하나의 해자에는 반드시 물이 들어오는 입수구(入水溝)가 있고, 그 반대편에는 흘러넘치는 물을 다른 해자로 빼내기 위한 출수구(出水溝)가 있기 마련이다.
이번 4호 해자 또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축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4호 해자는 동서 길이 80m에 남북 너비 40m에 달하는 상당한 규모이며, 일부 구역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공중에서 내려다 본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에 가깝다. 4호 해자는 모두 3차에 걸쳐 축조된 흔적을 확인했다. 즉, 신라가 고구려, 백제와 국운을 건 일대 경쟁을 벌이던 7세기 후반 무렵에는 사람 머리 크기 만한 강돌을 쌓아 1차 해자를 축조했다가 8세기 전반 무렵에는 상대적으로 잘 다듬은 장방형 돌로 2차 해자를 쌓았으며, 그 이후 언젠가는 강돌과 다듬은 돌을 혼용한 제3차 해자를 조성했던 것이다.
▲월성해자(池)
▲월성해자(池)
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해자의 축조 방법과 기능이 점차 변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볼 수 있다. 구조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할 때 후기로 가면서 해자는 본래의 방어적인 기능보다는 조경이라는 기능이 강하게 반영됐다고 추정된다. 다시 말해 해자를 처음 만들 무렵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군사용 시설이라는 성격이 강했지만, 신라가 삼국통일을 달성한 뒤에는 이런 염려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으므로, 이제는 궁궐의 아름다움을 치장하는 조경 시설로 탈바꿈시켰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사다함과 무관랑에 얽힌 이야기가 있다. 비록 짧은 이야기 이지만 사다함과 무관랑은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친구 사이였다.
<含>始與<武官郞>, 約爲死友. 及<武官>病卒, 哭之慟甚, 七日亦卒, 時年十七歲.
사다함이 전에 무관랑(武官郞)과 더불어 죽음을 같이하는 친구(死友)가 되고자 약속했는데, 무관이 병들어 죽자 매우 슬프게 울다가 7일만에 그 또한 죽으니, 그때 열일곱 살이었다.
<삼국사기 열전 사다함전>
▲월성해자(池)
▲월성해자(池)
그런데 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사다함과 무관랑의 관계 및 무관랑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실려있다.
公臣武官郞亦多功 以微賤不報而卒 公爲之傷 金珍娘主素荒于色 多?郞???武官郞密納之 武難于斯多含???○○○○?慰之曰 非汝也母也 吾與○○○○○??友 何以小嫌爲 金珍聞○○○○○○?自知道理 所(以)寬我乃?(武官郞)○○○出入同之 郎徒多有非之 武欲逃而○?夜超宮墻 落于溝池而傷 未幾而卒
(사다함)공의 신하인 무관랑 또한 공이 많았으나 (신분이) 미천해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이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금진낭주는 평소 색에 빠졌다. 많이 ... 무관랑을 몰래 들였다. 무관랑은 사다함을 대하기 어려웠는데 ... (사다함이) ... 위로하기를 "네가 아니라 어머니 때문이다. 나와 더불어 ... 벗으로 ... 어찌 작은 혐의를 문제삼겠는가"라고 했다. 금진이 이를 듣고 ... 스스로 도리를 알았다. 나에게 너그러운 것은 바로 ... 무관랑 ... 함께 출입하였다. (하지만 이를) 낭도 중에는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았다. 무관랑은 도망 가자고 해서 ... 밤에 몰래 궁궐 담장(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에 떨어져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필사본 화랑세기 5세 사다함전>
▲월성해자(溝)
▲월성해자(溝)
무관랑은 궁궐 담장에서 구지로 굴러 떨어져 부상을 입고 죽은 것으로 나와 있다. 그럼 무관랑이 떨어진 구지란 무엇인가? 구지는 말 그대로 물이 흐르는 구(溝), 즉 도랑과 물을 가두어 두는 일종의 연못 시설인 지(池)를 가리키는 말이다. 월성은 앞에서 말한대로 동서폭이 860m에 달하는 초승달 모양의 성곽이며 동쪽과 서쪽의 높낮이 차이가 최대 18m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큰 하나의 도랑으로만 성벽의 해자를 만들었을 경우에는 해자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높낮이 차이로 인하여 물을 가둬둘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벽을 둘러가며 군데군데 몇 개의 독립된 연못(池)를 파고 거기에 물을 채웠고, 연못 사이에는 도랑(溝)을 파서 연결하였다.
<2009.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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