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서봉총(瑞鳳塚)

2008. 6. 19. 07:46◈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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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릉 가는 길 - 경주 서봉총(瑞鳳塚)

  

1926년 일본인 고이즈미 등이 발굴 조사하였다. 발굴 전에 주위에 들어서 있던 민가에 의하여 원형이 크게 손상되어 있었다. 발굴 결과, 원래 서봉총은 표형분의 북분으로 지름 약36m, 높이 약 9.6m에 이르는 대형고분으로 추정되었다. 내부구조는 적석목곽분이었고 목곽은 지하에 설치되었고 목곽의 서쪽 가운데 목관을 안치하고 동쪽에는 부장품을 배치하였다.  

 

▲서봉총(瑞鳳塚)

 

▲서봉총 금관 

 

발굴당시 일본에 신혼여행 중이던 스웨덴의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가 이 발굴에 참여하였던 것을 기념하여 스웨덴의 한자식 표기인 서전(瑞典)에서 瑞자를 따고, 출토된 금관에 봉황(鳳凰) 장식 세마리가 붙어있는데서 鳳자를 다서 서봉총(瑞鳳塚)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한국인들은 봉황총(鳳凰塚)으로 명명할 것을 주장했지만 일본인들은 스웨덴(瑞典)의 아돌프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서전총(瑞典塚)으로 이름짓고자 하여 두 가지 이름을 합쳐서 국적불명, 족보미상의 서봉총(瑞鳳塚)으로 이름지어졌다. 민족의 문화유산도 주권이 없을 때 운명이 극명해짐을 느끼게 해준다. 지금도 서봉총 앞에는 스웨덴 황실 문양이 새겨진 기념비가 서 있다. 

 

 ▲서봉총 금관(옆면)

 

▲서봉총(瑞鳳塚)

 

서봉총에서 출토된 금관은 테 위에 직각수지형 장식과 노각형 장식을 한 신라 금관의 일반적 형태와 같으나 특이한 점은 관 내부에 十字形 굴레가 설치되어 있고, 굴레 위에는 세마리의 봉황형 장식이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관모를 쓰고 여자는 굴레를 쓰는 것이 시베리아 계통 샤먼들의 풍습이란 점을 고려하면 서봉총은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서봉총(瑞鳳塚)

 

▲서봉총(뒤) 데이비드총(앞)

 

금관과 함께 은제합(銀製盒)이 출토되었는데 뚜껑에 '延壽 元年인 辛卯년 3월 중에 은합을 만들었다'는 명문이 발견되었다. '연수'는 '延年益壽(해가 갈수록 수명이 더해지다)'란 뜻이다. 하지만 연수는 지금은 알 수 없는 잃어버린 연호이다. 신묘년도 451년 설과 511년 설이 갈려져 있다. 먼저 신라 적석목곽분은 6세기 전반에는 소멸되어가는 시점에 이렇게 대형의 적석목곽분을 축조한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지 않으므로 서봉총의 축조연대는 451년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이다.

 

또 511년 설은 서봉총 금관에 장신된 새와 관련하여 지증왕의 어머니인 조생부인(鳥生婦人)의 무덤이라는 설이다.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중략...<□勿王{奈勿王}>之曾孫, <習寶>葛文王之子, <照知王{麻立干}>之再從弟也. 母, <金>氏<鳥生>夫人, <訥祗王>之女...중략... 時年六十四歲.

지증 마립간이 왕위에 올랐다. ...중략...그는 내물왕의 증손이며,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고, 소지왕의 재종 아우가 된다. 어머니는 김씨 조생부인이며 눌지왕의 딸이다. ...중략... 이 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지증마립간전>

 

즉 조생부인은 생존연대가 자비왕(458~479), 소지왕(479~500), 지증왕(500~514)의 재위기간에 해당하므로 지증왕 재위 기간에 사망한 어머니를 위하여 화려한 유물을 매납하고 '신묘년' 명문이 들어간 은합을 함께 매납했다는 설이다. 그렇다면 신묘년은 511년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서봉총(瑞鳳塚)

 

▲서봉총(瑞鳳塚)

 

한편 1935년에는 평양박물관에서 서봉총 출토 금관을 비롯하여 허리띠와 장식, 목걸이, 귀걸이 들 중요 출토품 일체를 평야지역의 각 학교 선생님들과 학생들 그리고 지방의 유지들에게 특별히 관람시켰다. 그런데 특별 전시를 끝내고 서울박물관으로 돌려보내기 전날, 관장을 비롯한 평양박물관 직원들이 진열품을 몽땅 들고 기생집으로 가서 차릉파라는 평양기생의 머리에 이 금관을 씌우고 허리띠와 목걸이 등을 장식하게 하고는 술을 마시고 즐겼던 용서받지 못할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당시 신문의 사회면에 상세하게 실린 기사가 남아있다. 주권 없는 국가의 문화유산에 대한 비참한 모습을 말해주는 이야기이다.

 

▲서봉총(瑞鳳塚)

 

▲아돌프 황태자 서봉총 발굴 기념비

 

  서봉총의 남분을 데이비드총이라 부르는데 발굴비용을 영국인 David가 부담하였기 때문이 이렇게 부른다. 출토된 유물은 보잘 것 없는 것들이었다고 한다. 북분은 규모가 크고 금관이 출토되었는데 비하여 남분은 규모도 북분의 절반 정도로 작고 유물의 수준도 떨어졌다면 두 피장자의 관계는 무엇이었을까? 황남대총의 경우 남북분이 대등한 관계인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의 지위가 남성이 뒤떨어지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기념비 뒷면

 

▲서봉총(瑞鳳塚) 

 

▲금관을 쓴 기생 차릉파

 

 

 

<2008.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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