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용주사(龍珠寺)
불교를 억제하던 조선시대에도 생활 속에 오랫동안 젖어있던 불교 관습을 다 버릴 수는 없었고 왕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나라에서 사찰 건립을 공식적으로 억제했으나 능찰(陵刹)만은 예외였다. 능찰은 조포사(造泡寺)라고도 불렀는데, 두부를 만드는 절이라는 뜻으로 왕릉에 제사를 올릴 때 제수로 올릴 두부를 만들어 제공하였다. 능찰에서는 왕릉을 관리하기도 하였는데 능찰이 되면 승려들이 인근 양반들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 아니라 노역에 시달리는 일도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용주사는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염거화상이 창건한 갈양사(葛陽寺)가 있던 자리에 정조가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크게 다시 짓고 원찰로 삼은 절이다. 현륭원에 왔던 정조가 어느 날 갈양사에 들러 한 스님이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을 강의하는 것을 듣고 깊은 감명을 받고 이 절을 현륭원의 원찰로 크게 중창했다. 정조는 이 절이 완공되는 날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뒤 절 이름을 용주사(龍珠寺)로 정했다고 한다.
현재 용주사는 비교적 창건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절의 전체적 인상이 관청건물을 연상시킨다. 정문인 외삼문 양쪽으로 낮은 행각이 일직선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천보루는 아래층이 개방된 장대한 2층 누각으로 잘 다듬은 높은 네모 돌기둥이 서 있고, 천보루 좌우로 좌우대칭의 판자로 된 행각이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여느 절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대웅보전은 높은 장대석 석축 위에 우뚝 서 있다. 법당 내부에는 채색이나 그림표현에서 서양화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평가되는 후불탱화가 걸려있다. 부처님 얼굴에 명암법이 사용되고 색조도 전통적인 적색과 녹색 위주에서 벗어나 옅은 청색이나 갈색이 사용되었다. 이 불화는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전해오지만 단정할 만한 근거는 부족하다.
용주사가 창건된 후 부모은중경 목판이 제작 봉안되었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가 아버지를 위하여 창건한 절이었으니 당연한 사업이었다. 부모은중경은 대표적인 위경으로 조선시대에 일반에 널리 유행하면서 불교 경전의 하나로 취급되었다. 정조 사후에도 용주사에는 동판과 석판으로 부모은중경이 제작 봉안되었다. 뿐만 아니라 용주사 부모은중경은 1981년에 삼층석탑으로도 만들어 세워졌다.
▲용주사(龍珠寺) 천왕문
▲천왕문 사천왕
▲천왕문 사천왕
▲천왕문 사천왕
▲천왕문 사천왕
▲외삼문
▲반룡석주
▲반룡석주
▲외삼문
▲외삼문
▲용주사(龍珠寺) 편액
▲외삼문 석수
▲외삼문 석수
▲오층석탑
▲오층석탑
▲천보루(天保樓)
▲오층석탑과 천보루
▲오층석탑과 천보루
▲ 천보루 편액
▲천보루
▲천보루 사각석주
▲천보루 행각
▲천보루 행각
▲홍제루(천보루)
▲홍제루(弘濟樓) 편액
▲대웅보전 중정
▲대웅보전
▲대웅보전
▲용주사(龍珠寺) 대웅보전
▲용주사(龍珠寺) 대웅보전 계단
▲대웅보전 후불벽화(박물관 사진)
▲대웅보전 후불벽화(박물관 사진)
▲천불전
▲부모은중경 석탑
▲부모은중경 석탑
▲지장전
<200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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