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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융건릉 - ①융릉(隆陵)

蔥叟 2008. 2. 5. 07:02

화성 융건릉 - ①융릉(隆陵)

 

   융건릉(隆健陵)은 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아들이며 사도세자로 더 잘 알려진,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추존황제 장조)와 혜경궁 홍씨(추존 헌경의왕후)가 잠들어 있는 융릉(隆陵), 정조와 효의선황후가 잠들어 있는 건릉(健陵)을 합쳐서 부르는 이름이다. 융건릉의 주산인 화산(花山)은 풍수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고산 윤선도가 '세종의 영릉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화산이 반룡농주(盤龍弄珠, 누워있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함)형국이다. 참으로 복룡대지(福龍大地)로서 용이나 혈(穴)이나 지질이나 물이 더없이 좋고 아름다우니 참으로 천리를 가도 그만한 곳은 없고 천년에 한 번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말했던 자리였다. 

 

   사도세자가 죽자 아버지 영조는 양주 배봉산 아래 언덕에 예장하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고 했다. 1776년 영조가 승하하고 정조가 즉위하자 즉시 아버지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수은묘의 격을 높여 원(園)으로 올리고 원호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다. 그후 13년이 지난 후 영우원이란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으로 고치고, 현재의 위치로 천장했다. 1899년 고종은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하여 묘호를 장종으로 올리고 능호를 융릉이라 했다.

 

   정조는 현륭원을 조성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당시에는 왕릉이 아니었음에도 왕릉에 버금가는 시설과 상설을 설치했다. 융릉이 들어선 화산은 말 그대로 지형이 꽃봉오리가 둘러싼 형태이고 꽃심에 해당하는 곳이 융릉 능침이다. 꽃심은 혈이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융릉은 쌍릉이 아닌 합장릉이다. 융릉은 12면의 병풍석을 세웠으며, 면석에는 인조의 장릉에서와 같이 모란과 연화문을 조각했다. 그리고 인석은 특이하게 꽃봉오리 모양을 하고 방위표시인 십이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난간석은 두르지 않았으며 능침 앞에 혼유석을 놓았고, 망주석 한쌍, 석양과 석호를 각각 한쌍씩 놓아 초계를 이루고 있다. 그 뒤로 곡장을 3면에 둘렀다.

 

   중계에는 문인석 한쌍을 배치하고 가운데에는 팔각 장명등을 세워놓았다. 문인석은 복두를 쓰던 이전의 왕릉들과 달리 금관을 쓰고 있다. 또한 세자의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무인석을 세웠다. 이처럼 왕으로 추존되기 전에 조성한 무덤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능을 장식한 것은 비운에 간 부왕의 무덤을 왕릉에 버금가도록 꾸미려는 정조의 효성을 엿볼 수 있다. 정조의 효성을 전해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어느날 현륭원을 찾은 정조가 소나무에 송충이가 많이 번식하여 소나무를 갉아 먹는 것을 보고 송충이를 잡아 입으로 씹으면서, '아무리 미물일망정 네 어찌 내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정성껏 가꾼 소나무를 갉아먹느냐?' 하고 꾸짖었다. 그러자 천둥번개와 함께 장대비가 쏟아져 송충이들이모두 죽었다고 한다.

 

▲융릉(隆陵) 가는 길

 

▲융릉(隆陵) 홍살문과 정자각  

 

▲융릉(隆陵) 사초지

 

▲융릉(隆陵) 능침

 

▲융릉(隆陵) 능침

  

▲융릉(隆陵) 능침

 

▲융릉(隆陵) 능침

 

▲융릉(隆陵) 병풍석

 

▲융릉(隆陵) 무인석

 

▲융릉(隆陵) 무인석

 

▲융릉(隆陵) 문인석

 

▲융릉(隆陵) 장명등

 

▲융릉(隆陵) 고석 귀면

 

▲융릉(隆陵) 병풍석

 

▲융릉(隆陵) 병풍석 12지

 

▲융릉(隆陵) 10간

 

▲융릉(隆陵) 병풍석 복련

 

▲융릉(隆陵) 석양, 석호

 

▲융릉(隆陵) 망주석

 

▲융릉(隆陵) 망주석 세호

 

▲융릉(隆陵) 곡장

 

 

 

<2008.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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