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층석탑

2007. 12. 12. 02:35◈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남산 용장사터 삼층석탑

 

석가모니께서 80세에 쿠시나가라 사라수 아래에서 서쪽으로 머리를 두고 입적하셨다. 그의 상수제자(常隨弟子)인 아난다(阿難陀)가 석가모니께 장례방법에 대해 묻자 인도식으로 화장하되 재가신도(在家信徒)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제자들에게는 장례에 참석하지 말고 자등명 법등명(自燈明法燈明)하여 열심히 공부하고 정진하라는 유언을 남긴다. 쿠시나가라 열반당에서 입적한 후 약 1km떨어진 천관사에서 다비식이 거행되었다. 화장기간은 약 1주일. 많은 불자들이 다비식에 참여하여 예배하고 꽃을 공양하고 음악을 연주했다. 굳이 그대로 믿을 바는 못되지만 경전에 의하면 다비(茶毘) 후 8자루의 사리가 나왔다고 하며 신도들은 앞다투어 이 사리를 나누어 가지려고 했다. 결국 일곱나라와 한사람의 신도가 사리를 나누어 8기의 탑을 세워 모시게 되니 이것이 근본팔탑이다.  

 

*용장사터 삼층석탑

 

*용장사터 삼층석탑  

 

*용장사터 삼층석탑

  

그러나 근본팔탑은 사원 안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제가 신도들이 사는 마을에 세워졌다. 따라서 신도들은 더 이상 사원에 오지 않고 탑돌이를 하면서 신앙행위를 하였다. 고대 인도에서 절대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그의 오른쪽으로 세 바퀴를 돌았다. 이른바 우요삼잡(右繞三?)이라는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승려들은 신도들을 사원으로 들어오게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사원 안에 탑을 세워 예배하게 된 것이다.

 

인도를 통일한 아소카 왕은 불교를 세계적인 종교로 만든 장본인이었다. 통일전쟁 중에 쓰러져간 수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사원을 짓고 일곱 나라의 탑에 있던 사리를 모아 전국에 나누어 팔만사천개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후 인도 안에서만 이루어지던 불교가 히말라야를 넘어 중국과 서역으로 스님들의 포교활동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용장사터 삼층석탑

 

*용장사터 삼층석탑

 

*용장사터 삼층석탑

 

초기인도의 탑은 모두 벽돌탑이었다. 중국도 마찬가지로 벽돌탑을 쌓았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초기에 목탑을 세웠다. 목탑으로 시작한 우리 나라의 탑은 그후 석탑으로 바뀌었지만 목탑의 특징도 그대로 남아있다. 우주와 탱주 등의 목탑에서의 기둥모양을 그대로 석탑에 새긴 것이다.

 

용장사터 삼층석탑 역시 우주와 탱주를 갖춘 기단부와 우주를 새긴 3층의 탑신부 그리고 지붕돌로 이루어졌다. 이 탑은 일반적인 삼층석탑이 대체로 2중의 기단을 갖고 있는데 비해 단층의 기단으로 처리되었으며 기단 아랫부분은 자연 암반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데 기단 아래에 돌이 있는 것은 석가모니께서 법화경을 설법하시던 인도의 영축산(靈鷲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남산자체가 영축산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많이 줄어든 규모나 기단부의 탱주가 하나밖에 없으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4개로 줄어든 점등으로 보아 9세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용장사터 삼층석탑

 

 

  

<2007. 11.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