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향기를 찾아서 - (11, 끝)양양 낙산사
2007년 11월 16일 낙산사 원통보전 낙성식이 있었다. 더불어 새로 조성된 동종의 타종식도 거행되었다. 지난 2005년 4월 5일 양양지방에 일어난 대형 산불로 낙산사는 한줌의 재로 변하였다. 낙산사 주변의 아름다운 솔숲은 흔적 없이 사라졌고, 낙산사 중심불전인 원통보전도 한줌의 재로 변하였고 조선초기의 동종도 녹아 없어졌다. 그 원통보전과 동종이 복원된 것이다. 하지만 낙산사를 낙산사답게 해주던 아름다운 솔숲은 1백년이나 지나야 그때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원효의 향기를 찾아가는 마지막 여정은 낙산사이어야 한다. 수도인 서라벌을 떠나 먼 곳에도 원효의 향기는 퍼져 있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원효에 관한 기록은 그의 비범함과 뛰어난 법력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낙산사에 전해오는 의상과 원효의 차이에 관한 기록에서 의상은 뛰어난 인물이요, 원효는 하잘 것 없는 인물로 묘사한 기록을 접하게 된다.
*동해 낙산사
*동해 낙산사 해수관음상
옛날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의 진신이 이 해변의 어느 굴 속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이 곳을 낙산이라 이름했다. 이는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 관세음보살이 있다는 산)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라고도 했는데, 백의대사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것을 빌어다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의상은 재계한 지 7일 만에 좌구를 새벽 일찍 물 위에 띄웠더니 용천팔부(불법을 수호하는 여러 神將)의 시종들이 그를 굴 속으로 안내했다. 공중을 향하여 참례하니 수정 염주 한 꾸러미를 내주었다. 의상이 받아 가지고 나오는데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보주 한 알을 바치니 의상이 받들고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 나서 이에 관음의 참 모습을 보았다. 관음이 말했다.
"좌상의 산 꼭대기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당에 불전을 마땅히 지어야 한다."
법사가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 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만들어 모시니 그 둥근 얼굴과 고운 모습이 마치 천연적으로 생긴 것 같았다. 그리고 대나무는 즉시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관음의 진신이 살고 있는 곳인 줄을 알았다. 이런 까닭에 그 절 이름을 낙산사라 하고, 법사는 자기가 받은 두 가지 구슬을 성전에 봉안하고 떠났다.
*동해 낙산사 홍련암
*동해 낙산사 홍련암
그 후에 원효 법사가 뒤이어 와서 여기에 예하려고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논 가운데서 벼를 베고 있었다. 법사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청하자, 여인은 벼가 영글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법사가 또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자 한 여인이 월수백(月水帛-월경때 입었던 옷)을 빨고 있었다. 법사가 물을 달라고 청하니 여인을 그 더러운 물을 떠서 바쳤다. 법사는 그 물을 엎질러 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 때 들 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마리가 그를 불러 말했다.
"제 (醍 -원문에 한글자가 빠져있음)화상은 가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문득 숨어 보이지 않는데 그 소나무 밑에는 신발 한 짝이 떨어져 있었다.
법사가 절에 이르니 관음보살상의 자리 밑에 아까 보았던 신발 한 짝이 있으므로 그제야 하까 만난 성녀가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이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또 법사가 성굴로 들어가서 다시 관음의 진용을 보려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나므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떠났다.
<삼국유사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 관음.정취,조신조>
*동해 낙산사 범종각
*동해 낙산사 원통보전
의상과 원효는 모두 신라불교에서 쌍벽을 이루는 큰인물인데 어떻게 의상은 관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었고 원효는 만났으면서도 관음보살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못난 스님으로 묘사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기록은 후대에 의상을 추종하는 일파가 원효를 의도적으로 격하시키기 위한 기록일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후 새로운 국가 체제를 갖추고자 할 무렵의 신라 입장에서는 6두품 출신인 원효의 자율성보다는 진골귀족 출신인 의상의 질서체게를 옹호하는 이념이 필요했기 때문에 원효에게 향하는 민심을 의상에게 돌리기 위한 기록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또 누구를 편들거나 깎아내리려는 아니라 인간답게 다가오는 원효의 매력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의상이 치밀하고 정성스럽게 진신을 만나는 과정은 하나의 전범을 보여 주지만 세상에 사는 보통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 같은 경지에 오르기도 어렵고, 그런 계기도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도의 경지는 참으로 높은 데에만 있지 않고, 우리들의 일상 곳곳에 숨어들어 있는 것 또 한 사실이다. 거기서 우연히 스치는 수많은 만남이야 말로 우리들이 흔히 경험하는 바이다. 이런 만남이 오히려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럼 여기서 과연 원효의 신분은 6두품이었을까를 논해볼 필요가 있겠다. 일반적으로 원효는 기득권 승려들로부터 배척을 받았고, 권력과도 결탑한 바가 없었다. 항상 대안스님이나 혜공 같은 민중 승려들과 어울리며 살았다. 지금까지 원효가 6두품 출신이기 때문에 그러했으리라 여겨왔다. 꼭 그렇까? 대안이나 혜공이 당나라 유학을 하지 않은 국내파 승려였듯이 원효 또한 유학을 포기하였음은 이미 말하였다. 원효는 모두가 알다시피 속성이 설씨였다. 그리고 설씨는 6두품이라고 당연히 믿어왔다.
姬人姓薛氏 本東明國王金氏之胤也 昔金王有愛子 列食於薛 因姓焉 世與金氏爲婚 其高會皆金王貴臣大人也 父永沖有唐高宗時 與金仁問歸國……
부인의 성은 설씨로 본래 동명국왕 김씨의 후손이다. 옛날에 김씨왕에게 사랑하는 아들이 있어 설땅을 식읍으로 나누어 주었는데 그로인해 설을 성으로 하였다. 대대로 김씨와 혼인하였으며, 그 고조와 증모 모두 김씨 왕종의 신하요 대인이었다. 아버지 영충은 당 고종 때에 김인문과 더불어 귀국하였으며……
<관도곽공희설씨묘지명병서(館陶郭公姬薛氏墓誌銘幷序)>
중국에서 발굴된 설씨 묘지명에는 진골귀족이던 낌씨가 설씨로 성을 바꾸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같은 일은 백제의 흑치상지의 경우에도 볼 수 있는 일이다. 흑치상지는 본래 백제왕족인 부여씨였는데 흑치에 봉해지면서 흑치씨로 바꿨다는 것이다. 이같은 자료들은 성씨의 분화과정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원효는 흥륜사 황룡사 등 신라 최고의 사찰에 머물렀던 최고의 신분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번 획득된 신분이라 하더라고 세월이 흐르면서 왕위계승권에서 멀어지면 골품이 강등되는 족강(族降)현상도 많이 있었다.
*동해 낙산사 홍예문
*동해 낙산사
설계두는 신라 귀족 가문의 자손이었다. 일찍이 친구 네 사람이 함꼐 모여 술을 마시면서 각자 자기의 뜻을 말하였는데, 설계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서는 사람을 등용하는데 골품을 따지기 때문에 진실로 그 족속이 아니면, 비록 큰 재주와 뛰어난 공이 있어도 그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나는 원컨ㄷ대 서쪽 중국으로 가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지략을 드날려 특별한 공을 세워 스스로의 힘으로 영광스런 관직에 올라 의관을 차려 입고 칼을 차고서 천자의 측근에 출입하면 만족하겠다. 무덕 4년(621)에 몰래 바다의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 갔다."
<삼국사기 열전 설계두전>
설씨는 본래 귀족 가문이었는데도 설계두는 신분이 미천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설씨는 후대에 족강되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같은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원효는 6두품이 아닌 진골귀족 출신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여진다.
사진 출처 : http://blog.daum.net/so11forum/13805650
<2007. 11. 20>
'◈한국문화순례◈ > 영동태백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릉 객사문(客舍門) (0) | 2008.10.04 |
---|---|
강릉 임영관터(臨瀛館址) (0) | 2008.10.04 |
양양 진전사터 부도 (0) | 2007.10.20 |
양양 진전사터(陳田寺址) 삼층석탑 (0) | 2007.10.19 |
속초 향성사터(香城寺址) 삼층석탑 (0) | 2007.10.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