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 속리산 법주사(俗離山法住寺)
호서제일가람 속리산 법주사. 우리나라에서 가장 바다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다. 높은 말티고개를 넘어왔기 때문일까? 이토록 깊은 산중에 꾀나 넓은 분지가 자리잡았다. 그러나 산세는 아름다워서 사방을 둘러 기암괴석이 바라다 보인다. 이름그대로 속리산은 속세가 싫어서 떠나온 산이요. 그러니 법주사는 사람이 속세가 싫어서 떠나온 곳이 아니라 절이 속세를 버리고 찾아온 곳이리라. 그곳에 부처님의 법이 상주하는 절이기에 법주사가 된 것이다.
주차장에서 절로 가는 길은 꾀나 넓은 아스팔트 길이 곧게 뻗어있어 속세를 떠난 기분이 통 들지 않았다. 넓은 길가에는 각종 기념품과 토속음식들을 파는 가게들이 무진장이다. 어느 가게 아주머니가 동동주 한잔 시식하고 가랜다. 동동주 한잔을 얻어 마시고 내려올 때 들르라는 말을 뒤로 흘리며 상주하시는 부처님의 법을 찾아가는 길을 재촉하였다.
다리를 건너면 울창한 숲길이 나타난다. 이른바 오리숲이다. 초여름 신록이 우거질 때나 단풍이 물드는 가을이 역시 속리산 오리숲은 어울리는 것 같다. 겨울철의 숲길로는 역시 전나무 숲길이 최고다. 그것도 눈쌓인 전나무 숲길이. 연전에 부안의 능가산 내소사를 찾았을 때 마침 눈이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아 눈속의 전나무 숲길을 걸었다. 차가운 날씨에 눈길은 얼어붙어서 아이들은 겨우 기어갈 지경이었고 어른들도 미끄럼 타기에 여념이 없었지. 우리나라의 절들은 사하촌에서 절집까지의 숲길이 유명한 절이 많다. 이곳 법주사를 비롯하여 부안 내소사와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길, 청도 운문사의 소나무길, 그리고 울산 석남사의 잡목숲길, 영주 부석사의 은행나무 숲길 등이 인구에 회자된다.
*법주사 일주문
*일주문 편액
절의 창건 설화를 적은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의신(義信)스님이 천축으로 구법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 지을 터를 찾아다니는데 나귀가 이 곳에 이르자 더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를 맴돌았다고 한다. 스님이 주위를 살펴보니 절을 지을 만했으므로 이 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의 법이 머문다는 뜻을 담아서 절의 이름을 법주사라고 했다. 그후 성덕왕 19년(720)에 절을 중수했고 혜공왕 12년(776)에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중창하고 대찰의 규모를 갖추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사찰의 창건과 관련이 있는 진표율사와 그의 제자인 영심(永深)의 행적에 대하여 『삼국유사』 권제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藪石記)」조에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진표율사는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사람이다. 나이 12세에 출가할 뜻을 가지니 아버지가 허락하여 율사는 금산사 순재법사에게 가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순재가 <사미계법>과 <전교공양차제비법>1권과 <점찰선악업보경>2권을 주면서 말했다. 『너는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지장 두 보살 앞으로 가서 간절히 법을 구하고 참회해서 친히 게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도록 하라』 율사는 가르침을 받들고 작별하여 물러나와 두루 명산을 유람하니 나이 이미 27세가 되었다.
상원 원년 경자(760)에 쌀 20말을 쩌 양식을 만들어 보안현에 가서 변산에 있는 불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쌀 오합으로 하루의 양식을 삼았는데, 그 가운데서 한 합은 덜어서 쥐를 길렀다. 율사는 미륵상 앞에서 부지런히 계법을 구했으나 삼년이 되어도 수기를 얻지 못했다. 이에 발분하여 바위 아래 몸을 던지니 갑자기 청의동자가 손으로 받들어 돌위에 올려 놓았다. 율사는 다시 지원을 내어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도하여 돌로 몸을 두드리면서 참회하니 3일만에 손과 팔뚝이 부러져 땅에 떨어진다. 7일이 되던 날 밤에 지장보살이 손에 금장을 흔들면서 와서 그를 도와주니 손과 팔뚝이 전과 같이 되었다. 보살이 그에게 가사와 바리때를 주니 율사는 그 영응에 감동하여 더욱 더 정진했다. 21일이 다 차니 곧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상들이 오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에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의 앞에 나타나니 미륵보살이 율사의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잘 하는구나 대장부여! 이와 같이 계를 구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간절히 구해서 참회하는구나」 지장이 <계본>을 주고, 또 미륵이 목간자 두 개를 주었는데, 하나에는 아홉째 간자, 또 하나에는 여덟째간자라고 써 있었다. 미륵보살이 율사에게 말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뼈이니 이것은 곧 시와 본의 두 각을 이르는 것이다. 또 아홉 번째 간자는 법이고, 여덟 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이니 이것으로 마땅히 과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현세의 육신을 버리고 대왕국의 몸을 받아 이후에 도솔천에 가서 태어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을 마치고 두 보살은 곧 숨어버렸다. 이때가 임인년(762) 4월 27일이었다.
율사가 교법을 받고 금산사를 세우고자 하여 산에서 내려와 대연진에 이르자 갑자기 용왕이 나와서 옥(玉) 가사(袈裟)를 바치고 8만 권속을 거느리고 그를 옹위하여 금산사로 가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에 절이 완성되었다. 또 미륵보살이 감동하여 도솔천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와 율사에게 계법을 주니 이에 율사는 시주를 권하여 미륵장륙상을 만들고 또 미륵보살이 내려와서 계법을 주는 모양을 남쪽 벽에 그렸다. 상은 갑진년(764) 6월 9일에 완성이 되어 병오년(766) 5월 1일에 금당에 모셨으니 이해가 대력(大曆) 원년이다.
*오리숲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으로 행하는 도중에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의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우니 수레에 탄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서 물었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스님을 보자 우는 것6입니까? 그리고 스님은 어디서 오시는 분입니까?』 율사가 말한다. 『나는 금산사의 중 진표요. 나는 일찍이 변산의 불사의방에 들어가 미륵․지장의 두 보살 앞에서 친히 계법과 진성을 받았기 때문에 절을 지어 길이 수도할 곳을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 소들은 겉은 어리석은 듯하지만 속은 현명합니다.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소중히 여기는 때문에 무릎을 꿇고 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말한다. 『짐승도 오히려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나는 사람으로서 어찌 무심하겠습니까?』 그는 즉시 손으로 낫을 쥐고 스스로 자기 머리털을 잘라버렸다. 율사는 자비한 마음으로 다시 그의 머리를 깎아주고 계를 주었다. 이들은 속리산 골짜기 속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보고 표를 해 두었다.
그들은 명주 해변으로 돌아와 천천히 가는데, 물고기와 자라 등속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의 앞에 오더니 몸을 맞대어 육지처럼 만들어 주므로 율사는 그것을 밟고 바다에 들어가서 계법을 외어주고 자시 나가 고성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금강산으로 들어가서 비로소 발녀사(鉢淵藪)를 세우고 점찰법회(占察法會)를 열었다.
여기에서 7년을 살앗는데, 명주 지방에서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굶주렸다. 율사는 이들을 위하여 계법을 설하매 사람마다 받들어 지켜서 삼보(三寶)에 공경을 다하니, 갑자기 고성 앞 바닷가에 무수한 물고기들이 저절로 죽어서 나왔다. 사람들이 이것을 팔아 먹을 것을 장만하여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율사는 발연사에서 나와 다시 불사의방에 이르렀다. 그 후에는 고향으로 가서 그 아버지를 뵙기도 하고 혹은 진문대적의 방에서 살기도 했다. 이 때 속리산의 대덕 영심(永深)이 대덕 융종(融宗), 불타(佛陁)등과 함께 율사가 있는 곳에 와서 청했다. 『우리들은 천리 길이 멀다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노니 법문을 주시기 바랍니다』 율사가 잠자코 아무 대답도 안하니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 위에 올라가 거꾸로 땅에 떨어지면서 맹렬히 참회했다. 이에 율사가 교를 전하여 관정(灌頂)하고 드디어 가사와 바리때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1권과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2권과 간자 189개를 주었다. 다시 미륵진성 아홉째 간자와 여덟째 간자를 주면서 경계했다. 『아홉번째 간자는 법이요, 여덟번째 간자는 신훈성불종자(新熏成佛種子)다. 내가 이미 너희들에게 주었으니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그 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찾아 거기에 정사를 세우고 이 교법에 의해서 널리 인간계와 중생들을 건지고, 후세에까지 전하도록 하여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바로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세우고 길상사(吉祥寺)라 했다. 영심은 여기에서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
<삼국유사 관동풍악발연수(關東風岳鉢淵藪)조>
위의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속리산에는 법상종의 대찰인 길상사가 영심에 의해서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초창 때의 사찰이름은 길상사로 불려지다가 법주사 경내에 있는 자정국사비에 처음으로 법주사라는 사찰이름이 나타나므로 1342년경에 와서 비로소 지금의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창건된 법주사는 금산사, 동화사와 함께 대표적인 법상종 도량으로 1,500년을 하루같이 법등(法燈)을 밝히고 있다.
*금강문
*천왕문
법상종(法相宗)은 미륵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종파이다. 미륵보살의 ‘미륵’은 범어 ‘마이트레야(Maitreya)’의 음역으로, ‘친우’를 뜻하는 미트라(mitra)로부터 파생된 마이트레야는 자비(慈悲)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한자문화권에서는 미륵보살을 자씨보살(慈氏菩薩)이라고도 불려왔다. 금산사의 용화전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이라는 편액이 걸린 것도 이와 같은 이치이다.
불교사상의 발전과 함께 미래불이 나타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구제할 수 없었던 중생들을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대승적 자비사상에 근거하여 미륵보살이 가장 먼저 출연하게 되었고, ‘자씨(慈氏)’라는 이름으로 부려졌던 것이다. 미륵은 도솔천에 머무르면서 미래를 생각하며 명상에 잠겨서 수행하다가 석가모니불이 입멸(入滅)한 뒤 56억 7천만년 이 되는 때, 즉 인간의 수명이 8만 세가 될 때에 이 사바세계에 태어나 화림원(華林園)안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여 1회에는 96억인이, 2회에는 94억인이, 3회에는 96억인이 각기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게하여 총 3회에 걸쳐 272억인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용화삼회(龍華三會)의 설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미륵보살을 신앙하는 사람이 오랜세월을 기다릴 수 없을 때에는 현재 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나고자(上生), 또는 보살이 보다 빨리 지상에 강림하기를(下生) 염원하며 수행하는 미륵상생신앙과 미륵하생신앙으로 나누어지기도 한다.
숲길 가운데쯤에 일주문이 섰다. 이곳부터 절집의 물리적 영역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지는 숲길을 계속 걸으면 숲이 끝나면서 금강문이 나타난다. 금강역사가 지키는 곳이다. 금강문을 지나면 왼편으로 하늘높이 치솟은 철당간이 보인다. 고려 목종 10년(1007)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가 1866년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짓기 위하여 당백전을 만들기 위하여 이 철당간을 녹였다고 한다. 그후 1907년에 다시 세웠고 여러 차례 재건 공사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니 그 역사가 마치 20세기의 우리민족의 고난을 보는 듯하다. 철당간은 이제 우리나라에서 몇 남지않은 소중한 유물이다. 공주 갑사의 철당간, 청주의 용두사터 철당간 그리고 이곳 법주사 철당간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 옛날에는 그 위에 사찰을 알리는 당간이 휘날렸겠지.
이제 천왕문을 지나 부처님의 세상에 들어왔다. 절에는 참 문도 많다. 일주문, 금강문, 천왕문, 불이문 등 이곳을 모두 통과해야 부처님 세상이다. 법주사에는 불이문이 없으니 천왕문을 지나면 완전히 절 안이다. 사찰의 영역은 물리적 영역과 신앙적 영역으로 대별해볼 수 있다. 물리적인 영역이야 일주문 안쪽을 말하지만 신앙적 영역은 대체로 천왕문이나 불이문을 지나서부터 라고 말할 수 있다.
법주사의 천왕문은 대단히 큰 규모이다. 가운데 칸이 넓고 양옆칸은 모두 좁고 높다. 매우 낮은 기단 위에 문턱을 두었기 때문에 계단을 오랏다가 다시 내려가야 한다. 문안에 들어서면 내부가 웅장하여 노라게 된다. 또 문안에서 내다보면 팔상전의 위용이 눈앞에 나타나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팔상전
현재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삼국시대 이래로 유명한 황룡사 9층목탑을 비롯하여 흥륜사, 영묘사, 사천왕사 등에 많은 목탑이 세워졌고 조선 초기까지는 상당수의 목탑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의 병화에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고 한다. 다만 임진왜란 뒤인 1605년에 사명대사가 재건한 법주사의 팔상전과 1690년에 재건한 쌍봉사의 대웅전이 남아 있었으나 1984년에 쌍봉사 대웅전은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5층목탑인 법주사 팔상전만이 유일하게 남아 우리나라 목탑의 윤곽을 짐작하게 한다.
팔상전은 정사각형의 돌로 만든 기단부 위에 목조로 세운 5층의 탑신부 그리고 철제의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는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사방에 건물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계단이 놓여있다.
팔상전의 내부는 1층을 지탱하는 바깥기둥인 변주(邊柱, 平柱라고도 한다)와 3층을 지탱하는 고주(高柱), 그리고 5층을 받치고 있는 사천주(四天柱)가 보이고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천주 안쪽에는 5층을 받치면서 상륜부를 지탱하는 찰주(刹柱, 心柱라고도 한다)가 서있으며, 사리는 찰주 아래의 심초석(心楚石) 속에 봉안되어 있다.
팔상전 내주는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워진다. 사리를 봉안하는 사천주 안쪽의 공간, 사천주와 고주 사이에 있는 불상과 팔상도, 그리고 고주와 변주 사이에 있는 예배자를 위한 공간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구조는 수행자나 참배자가 예배공간으로서의 목탑의 모습을 살펴보기에 알맞다.
인도의 초기불교에서 존경하는 대상에 대하여 오른쪽으로 3바퀴를 도는 이른바 우요삼잡(右繞三匝)이라는 예법이 있었는데 이것이 발전하여 탑돌이가 되었다고 한다. 팔상전의 내부구조는 우요삼잡 의례를 행하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구조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그림을 팔상도라고 한다. 팔상도가 봉안된 전각이기에 팔상전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팔상전의 동편계단을 올라 안으로 들어가면 불단이 보이고 불단 뒷면에 두폭의 팔상도가 걸려있다. 도솔래의(兜率來儀), 비람강생(毘藍降生), 사문유관(四門遊觀), 유성출가(踰城出家), 설산수도(雪山修道), 수하항마(樹下降魔), 녹원전법(鹿苑傳法), 쌍림열반(雙林涅槃)으로 구성된 팔상도를 차례로 감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심주 아래의 사리를 중심으로 우요삼잡의 의례를 행하게 된다.
도솔래의는 도솔천의 호명보살이 흰 코끼리 위에 앉아서 구름을 타고 마야부인의 태 속으로 들어가는 모습이며, 비람강상은 룸비니 동산에서 무수 가지를 잡고 있는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태자가 탄생하는 장면을 묘사하였다. 사문유관은 왕자 수업을 받으며 성장한 태자가 동서남북의 네 문을 돌며 늙고 병들고 죽는 사람들의 모습과 출가 사문을 보고 출가할 마음을 정하고, 유성출가장면은 사람들이 모두 잠에 취해 고요한 밤에 성을 넘어 출가를 결행하는 장면이다.
설산수도는 설산에 들어가 6년 동안 선정과 고행을 계속하여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데도 해탈은 길이 보이지 않자 고행을 그만두고 목욕을 하고 기운을 차리고 수하항마는 보리수 밑에서 진정한 깨우침을 얻기 전에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투철한 각오로 명상에 들어간 태자에게 유형․무형의 온갖 유혹과 위협이 방해했지만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 붓다가 된다. 녹원전법은 깨달은 법을 45년 동안에 걸쳐 대중들에게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들이 진리 수행에 동참하도록 하는 장면이며, 쌍림열반은 교화 끝에 80세에 이르러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들고 사리는 팔분되어 불탑이 세워지는 장면이다.
*팔상전
*쌍사자 석등
팔상전을 지나 다시 북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사모지붕의 작은 보호각 속에 두 마리의 사자가 마주서서 두 앞다리로 받들고 있는 석등이 보인다. 쌍사자 석등이다. 쌍사자 석등은 경남합천의 영암사터 쌍사자 석등, 국립광주박물관에 잇는 중흥산성 쌍사자 석등과 함께 신라3대 쌍사자 석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이 단연 우수하다.
불교에서는 사자를 지혜의 상징으로 통한다. 그래서 반야(般若)의 지혜를 상징하는 무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또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고도 한다. 사자가 포효하면 모든 동물이 굴복하듯이 부처님의 설법이 모든 중생의 번뇌를 제압한다는 것을 상징화한 것이 바로 쌍사자 석등이다.
두 마리의 사자 가운데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다른 한 마리는 입을 다물고 있다. 입을 벌려 ‘아’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은 창조와 시작을 의미하고, 입을 다문 사자는 끝과 소멸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쌍사자는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반야의 지헤, 그것을 넘어선 영원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며, 쌍사자가 앙련과 화사석을 받들어 부처님께서 영원토록 꺼지지 않는 반야지(般若智)의 등불로 세상을 밝히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신라 석등 중 뛰어난 작품 중의 하나로 조성연대는 성덕왕 10년(720)으로추정되고 있다. 등은 부처의 자비로 명랑한 생활을 하며 여러가지의 재앙을 예방하기 위하여 창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조 유물에 사자를 조각한 것은 삼국시대 이래 많은예를 볼 수 있으나 현존하는 석탑, 석등에 조각된 사자 중 법주사 쌍사자 석등이 가장 뛰어난 솜씨를 드러내고 있다. 다른 석등에 비해 불을 켜는 화사석과 그 위를 덮는 지붕돌이 큰 것이 특징이다.
*쌍사자 석등 화사석
*쌍사자
*사천왕 석등
쌍사자 석등에 담긴 깊은 불법의 진리를 되새기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앞을 바라보면 멀리 웅장한 대웅보전이 바라다 보이는데 그 사이에 또 하나의 석등이 자리하고 있다. 아 그런데 다가갈수록 장대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높이가 3.9m란다. 모두 팔각을 이룬 받침부와 몸체로 구성된 통일신라시대에 가장 널리 유행한 석등의 모습이다. 특히 화사석에는 사천왕이 새겨져 있어 사천왕 석등이라 불린단다. 정말 준수하고 균형감있고 품격이 잘 드러나는 석등이다.
사천왕 석등(보물 15호)은 신라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조각수법으로 보아 혜공왕(765-780재위)대에 진표율사가 법주사를 중창하던 때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화사석은 팔각으로 4면에 창을 나머지 면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였고,지붕돌 정상에는 보주를 받치고 있는 받침이 남아있다.
그런데 석등은 주불전 앞에 하나만 놓여지는 것이 원칙인데 대웅보전 앞으로 쌍사자 석등과 사천왕 석등 이렇게 두 개의 석등이 놓여있어 좀 이상하다. 어디서 옮겨온 것은 아닐까?
*사천왕 석등 화사석
*대웅보전
*대웅보전
이제 대웅보전 앞에 당도하였다. 쳐다만 보아도 대단히 규모가 큰 건물이다. 높이가 19m에 이른단다. 도 2층으로된 건물은 구례 화엄사 각황전과 부여 무량사 극락보전, 그리고 공주 마곡사 대웅보전 등 몇 안되는 귀중한 건물이다.
얕은 기단 위에 서 있는 중층인 이 건물은 신라 진흥왕 14년(553) 의신조사가 창건하고, 조선 인조2년(1624)에 백암대사가 중창한 것으로 총 120칸, 건평 170평, 높이 약 20m에 이르는 대규모의 건축물이다. 내부에는 앉은키가 5.5m, 허리둘레 3.9m에 이르는 국내 소조불 좌상으로서는 가장 크다고 알려진 3신불이 안치되어 있다. 중앙에 봉안한 불상은 진실로 영원한 것을 밝힌다는 진여의 몸인 법신 비로자나불이고, 좌측에 안치한 불상은 과거의 오랜 수행에 의한 과보로 나타날 보신 노사나불(아미타불)이고, 우측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여러가지 화신으로 나투신 석가모니불이다.
*대웅보전 계단
*대웅보전 계단 소맷돌
*희견보살상
대웅보전을 돌아서 서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작은 보호각 속에 희견보살상이 서 있다. 희견보살(喜見菩薩)은 성불의 큰 서원을 가지고 목과 뼈를태우면서까지 아미타불 앞에 공양하는 보살로서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어도 강한 의지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조성한 것이라 한다.
보살상은 모두돌 위에 다기모양의 그릇을 머리에 이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모두돌과 보살상 그리고 그릇의 세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얼굴 부분은 마멸이 심하여 자세히 볼 수 없지만 잘록하고 유연한 허리와 대조적으로 그릇받침을 받치는 양 팔은 힘겨운 듯한 모습을 꽤 사실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옷은 속옷 위에 가사를 걸쳤고, 띠 매듭과 옷자락이 무플 위에서 투박하게 처리 되었다. 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있는 희귀한 문화재이다. 전체 높이는 213cm이다.
*원통보전
*청동미륵대불
높이 33m, 무게 160여톤으로 청동입상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불이다. 대불 자리에는 신라 혜공왕 12년(776년) 진표율사가 조성한 금동미륵대불이 있었으나 대원군이 1872년 당백전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불상을 몰수해가면서 비어있다가 1964년에 시멘트 대불이 세워졌으며 1990년에는 이 자리에 다시 청동대불이 자리잡았다. 법주사(주지 지명)는 1990년 국내 최대 높이(33m)로 조성한 청동미륵대불의 겉면에 검푸른 녹이 발생하자 불상에 금옷을 입히기로 하고 2000년 11월 공사에 들어가 1년 6개월의 개금(改金) 작업 끝에 황금불로 모습을 바꾸었다.
*석련지
*석조
*철당간
법주사 당간지주는고려목종 7년(1006)에 조성된 것으로 조성당시의 높이는 약 16m에 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고종 3년(1866) 국가 재정마련을 위한 당백전 주조라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사찰의 수많은 금속물들이 수거된 바 잇었는데, 당시 이곳의 철당간 역시 파괴되었다. 곧이어 순종 당시(1910년경) 이곳 철당단은 22m의 높이에 원래 모양대로 복원되었으며, 1972년 다시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당간지주
*명문
*마애여래의상
*마애여래의상
높이 약 6m나 되는 큼직한 바위에 볼록 새겨진 이 여래좌상은 보기 드물게 의자에 앉아있는 의상(倚像)으로 옆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주는 미륵불상으로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마애불이다. 둥글고 온화한 얼굴, 길고 큼직한 코, 둥근 눈썹,뚜렷한 누두덩, 꼭 다문 두꺼운 입술 등은 길다란 귀, 삼도의 표현 등과 함께 고려시대 초기 마애불의 특징적인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넓은 어깨에 비해서 유난히 잘록한 허리는 비사실적인 수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점은 거의 수평적으로 처리한 조각 수법에서도 나타난다.
이 불상의 오른쪽에 오목 새겨진 마애조각은 선사시대 암각이라는 설도 있지만 의신조사가 불경을 실어오는 모습과 소가 불법을 구하였다는 법주사의 창건설화와 관계되는 암각화로 추정되고 있다.
*마애여래의상 상호
*마애지장보살상
*마애지장보살상
*마애지장보살상 상호
<2007.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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