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인왕동 출토 '南宮之印' 명 암키와
<국립경주박물관>
경주박물관 미술관 신축부지에서 발굴된 이 '南宮之印'명 암키와 조각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 문헌기록에 전혀 언급돼 있지 않은 왕궁을 고고학 자료를 통해 입증하게 되는 드문 사례다. 삼국사기에는 ‘월성’과 ‘동궁’ 등 10여개의 궁성 이름이 나오지만 ‘남궁’이란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고고-역사학계는 기와 발굴 당시의 정황이나 주변 환경을 고려할 때 이것이 출토된 현 경주박물관 자리가 바로 남궁이었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좁히고 있다. 경주박물관은 신라의 정궁으로 학계가 공인하는 월성(사적 16호)에 인접해 있다는 것이 첫번째 근거. 월성은 통일 이후 확장할 필요가 있었다. 좁았기 때문이다. 문무왕 19년(서기 679년), 동궁을 월성 근처 안압지에 건축한 것은 그런 까닭이다. 남궁도 통일 뒤 궁궐을 확장하면서 지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南宮之印' 명 암키와
지난 70년대 초반, 현 경주박물관을 신축하기 위해 기초공사를 했을 때 장대석(축대 등에 쓰려고 길게 다듬은 돌) 등 엄청난 양의 석재가 나왔는데 이는 바로 이곳이 동궁과 마찬가지로 본궁인 월성에 소속된 궁일 가능성을 암시했다면 ‘남궁지인’ 명 암키와는 이를 입증하는 자료라 하겠다.
이 암키와가 발견된 우물 내부에서 출토된 토기나, 주변에서 발굴된 도로 유적 등을 종합하면 우물은 서기 8세기 초반부터 9세기 중후반까지 사용됐다. 깊이 10m에 이르는 이 우물은 그러나 인위적으로 매립됐다. 우물 바닥 가까운 곳에서 어린 아이(6~7세)의 인골 1구와 4분의 1 마리 되는 소의 뼈, 서기 9세기 중후반기의 신라토기, 두레박 등이 정연하게 출토됐기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자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소와 토기를 빠뜨려 아이의 영혼을 달랜 뒤 흙으로 우물을 메워버린 것이다. 제수로 쓴 유물과 비슷한 깊이에서 출토된 ‘남궁지인’ 명 암키와는 주변 흙을 쓸어 담아 우물을 메우는 과정에서 함께 쓸려 들어간 것이다. 따라서 이 암키와는 8~9세기의 것이다.
*'南宮之印' 명 암키와
삼국사기를 통해 동궁이 태자궁의 역할을 했고, 북궁은 신라의 마지막 여왕인 진성여왕이 사망했던 곳(서기 896년)임을 알 수 있지만, 남궁이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을지 현재로서는 미지수이다. 다만 남궁이나 동궁, 북궁 등은 특별한 이름을 붙이지 않고 방위로 이름을 정했을 것이지만 남궁은 월성과 가까운 곳이라는 점에서 다른 궁과 격이 차이가 났을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정궁인 월성과 가깝고 주변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격이 높은 궁이었을텐데 왜 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느냐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아있다.
<2006.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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