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삼랑사터(三郞寺址) 당간지주
삼랑사터는 서천변에 있었는데 신라 진평왕 19년(597)에 창건되었다고 한다.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는 절터에 당간지주만이 쓸쓸히 남아있다. 당간지주는 높이 3.66m로 보물 제 127호이다. 삼랑(三郞)은 세 명의 화랑을 가리키는 말로 짐작된다. 삼국유사 경흥우성조에는 이절에 주석하던 경흥스님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온다.
신문왕 때의 고승 경흥은 성이 水씨이며 웅천주 사람이다. 18세에 중이 되어 삼장에 통달하니 그 시대에 명망이 높았다. 개요 원년(681)에 문무왕이 장차 승하하려 할 때 신문왕에게 고명(顧命)하기를, "경흥법사는 국사가 될만하니 내 명을 잊지 말라."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노(國老)로 삼고 삼랑사에서 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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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흥이 어느 날 대궐에 들어가고자 했다. 시종하는 이들은 동문 밖에서 먼저 채 비를 했는데 말과 안장은 매우 화려하였고, 신발과 갓 또한 제대로 갖추었으므로 길가 던 행인들은 모두 길을 비켰다. 그런데 그 때 거사 한사람이 몹시 엉성한 모습에 지팡 이를 짚고 있었다.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 와서 하마대(下馬臺)위에서 쉬고 있는데, 그 광주리 속에는 마른 물고기가 있었다. 시종하는 이가 그를 꾸짖기를, "너는 중의 옷을 입고서 어찌 부정한 물건을 짊어지고 있느냐?" 거사는 말했다.
"산 고기(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 고기를 지 고 있는 것을 싫어할 게 있다는 말인가?"
말을 마치자 그는 일어나 사라졌다. 경흥이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그를 뒤쫓게 했다. 그는 남산 문수사 문 밖에 이르러 광주리를 버리고 숨었는데 그가 짚었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고 마른 고기는 소나무 껍질로 변해 있었다. 사자가 돌아와 이 사실을 고하자 경흥은 이를 듣고 탄식하였다.
"문수보살이 와서 내가 말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한 것이었구나." 그 후 경흥은 종신토록 말을 타지 않았다.
<삼국유사 경흥우성(憬興遇聖)조>
삼랑사의 비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에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을 삼랑사터라고 추정하는 것은 대정 7년(1918)에 일본인 오전제라는 사람이 이곳에서 절 이름이 새겨진 기와를 다수 발견한데서 유래되었다.
*삼랑사터 당간지주
*삼랑사터 당간지주
*삼랑사터 당간지주
*당간지주 상부 앞면
*당간지주 상부
*당간지주 상부
*당간지주 옆면
*당간지주 옆의 고목
<20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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