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달구벌문화권

청도 호거산 운문사

蔥叟 2006. 8. 14. 07:53

청도 호거산(虎居山) 운문사(雲門寺)


   호랑이가 앉아있는 모습을 연상케한다는 호거산 아래 넓은 자리에 세워진 운문사(雲門寺). 운문사는 본래 다섯 개의 갑사 가운데 하나로 지어진 대작갑사(大鵲岬寺)라 했는데 보양 스님에 의해 재중창되며 작갑사(鵲岬寺)라고
이름을 고쳤고, 태조 왕건이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賜額)한 뒤부터 운문사라 불렸다.

 

운문사의 역사는 6세기말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 숙종 44년(1718) 채헌(彩軒)이 지은 「경상도청도군동호거산운문사사적(慶尙道淸道郡東虎踞山雲門寺事蹟)」에 의하면 운문사의 창건은 6세기말 진흥왕 때 지금의 운문사 인근의 금수동(金水洞)에서 3년간 수도한 후 득도한 어느 신승(神僧)이 560년 도반(道伴)들과 함께 갑(岬)자가 들어가는 다섯 개의 절(五岬寺)를 짓기 시작하여 7년만에 완성하였다. 오갑사는 가운데의 대작갑사(大鵲岬寺), 동쪽의 가슬갑사(嘉瑟岬寺), 남쪽의 천문갑사(天門岬寺), 서쪽의 대비갑사(大悲岬寺), 그리고 북쪽의 소보갑사(所寶岬寺)를 말하는 것인데 그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은 대작갑사가 바로 오늘날의 운문사라는 것이다. 대비갑사는 현재 대비사라는 이름으로 남아있으나 나머지 절들은 모두 폐사되었다.

 

운문사를 첫 번째로 중창한 스님은 원광법사(圓光法師)라고 한다. 원광법사는 수나라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황룡사에 머물다가 청도의 대작갑사로 와서 3년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옮겨갔다. 이때가 수(隋) 문제 개황(開皇) 11년(591)이다. 원광법사는 이곳에서 화랑이었던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주었다. 일연스님은 「삼국사」열전을 인용하여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진 선비 귀산이라는 사람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같은 동리의 추항을 벗으로 삼아 두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점잖은 선비들을 상대로 사귀기를 기약하지만 먼저 마음을 바로잡고 몸을 잘 가지지 않으면 욕을 가져올 염려가 있는 지라 어찌 어진 분 곁에 가서 도를 배우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이때에 원광법사가 수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서 가슬갑(嘉瑟岬)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두 사람은 그의 처소를 찾아가서 고하기를, ‘속세의 선비로서 어리석고 유치하여 아는 지식이 없사오니 바라옵건대 한 말씀 해주시면 죽을 때까지 계명으로 삼겠습니다.’ 하였다. 원광이 말하기를, ‘불교에는 보살 계명이 있어 그것은 열 가지로 되어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아마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다. 여기에 속세의 다섯 가지 계명이 있다. 첫째로 충성으로 임금을 섬기는 것이요, 둘째로 효도로써 부모를 섬기는 것이요, 셋째로 친구와 사귀어 신의가 있음이요, 넷째로 싸움에 다다라서는 물러섬이 없는 것이요, 다섯째로 생물을 죽이는 데는 가려서 하라는 것이니 너희들은 이것을  실행하되 소흘히 하지 말라!’ 하였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다른 것은 이미 잘 알았사오나 생물을 죽이는 데는 가려서 하라는 말씀은 특히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원광이 말하기를, ‘여섯 가지 재 올리는 날과 봄 여름 철에 살생을 않음은 때를 가리는 것을 이름이요, 부리는 짐승을 죽이지 않음은 한 점 고기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을 의미함이니 이는 물건을 가리는 것이다. 이 역시 그 소용되는 것만 하고, 많은 살생을 필요로 하지 않음이니 이것이 바로 세속의 좋은 계명이다’ 라고 하였다. 귀산 등이 말하기를, ‘이제부터는 삼가 시행하여 감히 어김이 없겠나이다’고 하였다. 그후 두 사람이 모두 군대에 종군하여 다 국가에 특출한 공로를 세웠다.”

 

<삼국유사 원광서학(圓光西學)조>


세속오계(世俗五戒)는 후에 신라의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의 중요사상으로 자리잡는다. 특히 다섯 번째인 살생유택은 불가에서 살생을 금지하는 계율을 전쟁터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이념적으로 틔워준 것이라 할 것이다. 가슬갑사는 운문사 입구 마을인 신원리에서 가지산 석남사로 넘어가는 운문령에 있는 문복산(文福山) 기슭의 절터로 추정되는데 주춧돌 10여개가 남아있어 80년대에 경북대학교에서 발굴 조사하였으나 가슬갑사라고 할 증거가 될만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원광법사가 대작갑사를 중창했다는 증거는 될 수 없는 기록이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원광서학」과「보양이목」조 끝부분에서 원광법사와 운문사는 아무 관련이 없음을 들고 김척명(金陟明)이라는 사람이 거리에 떠도는 얘기를 잘못 듣고 보양스님의 기록과 뒤섞어 기록하는 바람에 원광법사와 운문사가 연관있는 것처럼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통일신라에 걸친 기간 중에 운문사에 관한 기록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후삼국시대의 혼란기를 거쳐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왕건의 후원으로 절을 중창하게 된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보양국사이다.


법사가 처음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와 먼저 추화(推火, 지금의 밀양지방)의 봉성사(奉聖寺)에 머물렀다. 때마침 태조가 동쪽을 정벌하는 길에 청도(淸道) 지방에 이르러 산적들이 견성(犬城)에 모여 교만하게도 항복하지 않으므로 태조가 산밑에 이르러 법사에게 손쉽게 진정시킬 계책을 물었더니 법사가 대답하기를, “무릇 개라는 짐승은 밤을 맡고 낮을 맡지 않으며 앞을 지키면서 뒤는 잊고 있으므로 낮에 그 뒤를 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조(왕건)가 그대로 따랐더니 과연 적이 패하여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의 신통한 계책을 가상히 여겨 해마다 가까운 고을의 벼 50석을 주어 공양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절에는 두 분의 화상을 모시고 따라서 절 이름을 봉성사라고 하였다. 법사는 그 뒤에 작갑으로 와서 크게 불법을 이룩하고 죽었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璃目)조>


이렇게 하여 보양스님은 태조왕건의 고려왕조 창업에 군사적으로 도움을 줌으로서 태조의 신임을 받고 사세확장의 기회를 맞이하게 되었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하고 보양법사가 여기에 와서 절을 짓고 산다는 말을 듣고서 다섯 갑(岬)의 밭의 짐수 500결을 절에 바치고 청태(淸泰) 4년 정유(937)에 절 이름 현판을 내렸는데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하여 가사의 영험을 받들게 하였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璃目)조>


지금의 절이름 운문사는 바로 운문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왕건이 운문선사라는 이름을 내려준 것은 당나라의 고승 운문문언(雲門文偃)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석가모니가 내 앞에 다시 한 번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오만을 부린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겠다’고 호언할 정도로 대단한 스님이었다고 한다.


운문사의 3차 중창은 고려 원응국사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원응국사는 이곳을 하산소(下山所)로 삼아 내려온 이래 제3중창을 대대적으로 감행하였다.


문사에는 작갑전(鵲鴨殿)이라는 사방1칸에 사모지붕을 한, 운문사에서 가장 작은 법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석조여래좌상 1구와 사천왕석주(四天王石柱)가 있는데 이 작압전이 바로 보양스님이 세운 작갑사의 오층전탑이나 모전석탑의 후신이고 사천왕석주는 그 탑의 기단부 또는 1층에 세워졌던 사천왕상이 새겨진 기둥이라고 한다. 작갑전의 여래좌상과 사천왕상은 근본적으로 석굴암 양식의 계승이니 아마 굴실 형태를 갖춘 탑 안에 봉안하였던 것 같다. 원래 이 작갑전은 금당 앞의 석등과 대웅전 중심부를 연결하는 중심축선상에 있었다고 하니 더욱 확신이 간다. 작갑전의 역사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기록이 역시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이 절의 시조 되는 중(祖師智識, 寶壤法師를 가리킴)이 중국에서 불법을 전수하여 돌아오는데 서해 바다에 이르렀을 때에 용이 용궁 속으로 맞아들여 불경을 외우고 금색 비단 가사(金羅袈裟) 한 벌과 겸하여 아들 이무기(璃目)를 시켜 그를 모시고 따라가게 하면서 부탁하여 발하였다.

 

“지금 삼국이 소란하여 불교를 신봉하는 임금이 없으매 만약 그대가 내 아들과 함께 본국으로 돌아가 작갑에 절을 세우고 살면 도적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수면이 못 되어 반드시 불교를 호위할 현명한 임금이 나서 삼국을 평정할 것이다.”

 

말을 마치자 서로 이별하고 돌아와서 이 동리에 왔더니 갑자기 웬 늙은 중이 자칭 원광이라고 하면서 인궤(印櫃)를 안고 나와 이것을 주고는 사라졌다.

 

여기서 보양법사가 폐사를 부흥시키고 북쪽 고개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뜰에 5층으로 된 누런 탑이 있으므로 내려와서 찾아가 본즉 자취가 없었다. 다시 올라가 바라다보니 까치 떼가 와서 땅을 쪼고 있었다. 여기서 바다용이 작갑이라고 말하던 것이 생각나서 여기를 파보니 과연 옛날 벽돌이 무수히 나왔다. 이것을 모아서 높이 쌓으니 탑이 되면서 남는 벽돌이 없었으므로 여기가 전시대의 절터였음을 알게 되었으며, 절세워 역사를 마치고 여기에 살면서 절 이름을 따라서 작갑사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璃目)조>


지금의 작압전은 1941년에 지어졌으며 1940년까지도 작압전 자리에는 전탑의 모습을 한 옛모습의 작압전이 서있었고 조선고적도보에는 그 사진도 전하고 있다. 사진을 보면 감실이 마련된 모전석탑이나 전탑의 탑신 모습과 목조건물의 맞배지붕을 합쳐놓은 모습인데 이는 작압전의 본래모습이 전탑이나 모전석탑이었으며 탑이 무너지자 지붕을 얹고 보수한 모습이 틀림없다. 그런데 작압전(鵲鴨殿)이 작갑사에서 따온 이름이라면 작갑전(鵲岬殿)이어야 하는데 왜 작압전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남아있는 우리나라의 전탑이나 모전석탑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석주는 없지만 분황사모전석탑이나 안동 조탑동 오층전탑에서 인왕상이 새겨진 석주는 찾아볼 수 있다.

 

절을 중창한 보양스님에 관한 전설은 운문사 오백전의 뒷편의 계곡에 있는 이목소(璃目沼)에도 전하고 있다. 이목은 보양스님이 용궁에서 데려온 이무기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무기를 가리키는 이목(璃目)과 배나무를 가리키는 이목(梨木)의 동음이어(同音異語)를 재미있게 풀이하고 있다.


이무기는 늘 절 곁에 있는 작은 못에 살면서 음으로 불법의 교화를 돕더니 한 해는 갑자기 몹시 가물어 밭의 채소가 말라서 타므로 보양이 이무기를 시켜 비를 부르게 하여 온 경내가 흡족하였다. 하느님이 이무기의 건방진 행동을 벌주고서 죽이려 하였다. 이무기가 법사에게 급히 고하니 법사가 마루 밑에 숨겼다. 조금 있으니 하늘 사자가 뜰에 와서 이무기를 내놓으라고 청하므로 법사가 뜰 앞에 있는 배나무를 가리키니 그는 당장 배나무에 벼락을 치고 하늘로 올라갔다. 배나무가 꺾어지고 시들매 용이 어루만지니 곧 살아났다.(법사가 주문으로 살렸다고도 한다) 그 배나무가 근년에 땅에 넘어졌는데 어떤 사람이 그 나무로 방망이를 만들어 법당과 식당에 안치해두었는데, 그 방망이 자루에는 글이 쓰여 있었다.

 

                                  <삼국유사 보양이목(寶壤璃目)조>


보양스님에 의해 사세(寺勢)가 키워진 운문사는 인종 때의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전성기를 맞는다. 원응국사가 운문사에 들어온 것은 1129년이었다. 원응국사는 김부식, 윤언이, 정지상, 백수안 등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나 8세에 출가하여 13세게 구족계를 받았으며 병자를 잘 고쳤으며 가물면 비를 부르는 등의 이적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죽어가는 왕자를 소생시켰고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고 사람을 보내 여러 차례 불렀으나 끝까지 천태종으로 옮겨가지 않고 선종을 지킨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에 왕실의 후원을 받아 운문사를 중창하였다. 이때 나라에서 신수(新藪)와 신원(新院)등의 토지 200결과 노비 500명을 운문사에 내렸고, 원응국사가 운문사를 중창하자 ‘운문선원상사(雲門禪院上寺)’ 라는 사액(賜額)을 내렸다. 그래서 운문사는 500여 선찰 가운데 제2선찰이 되었다.

 

운문사 입구에는 원응국사의 비가 비각 속에 서 있다. 귀부와 이수는 부서졌으며 비신도 세 동강이 난 것을 쇠로 고정시켜 놓았다. 글은 당대의 유명한 문사였던 윤언이(尹彦伊)가 지었고 글씨는 탄연스님이 쓴 것으로 알려져있다. 원응국사비 옆에는 임진왜란 때 폐허가 된 운문사를 다시 일으킨 설송대사비가 서 있는데 비문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짓고, 형조판서 이정보(李鼎輔)가 쓰고, 도승지 이익보(李益輔)가 제액의 전서를 내었다고 하는데 이들은 한 집안의 종형제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고, 성장과 발전이 있으면 쇠퇴와 퇴보가 있게 마련이니 운문사의 역사도 내리막을 걷게 된다. 원응국사 이후 무신정권이 들어서고 전국도처에서 농민항쟁과 노비반란이 일어났다. 운문사가 있는 청도 또한 농민항쟁이 크게 일어났다. 청도 농민항쟁의 중심지는 바로 운문사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운문사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의 효심이 일으킨 농민항쟁으로 10년동안 계속되었다.

 

농민항쟁기간 동안 많은 사찰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고 운문사는 그 중심에 있었다. 이것은 더 이상 사원이 성소가 아니라 공격의 대상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농민항쟁의 원인이 토지의 수탈과 토지제도의 모순, 지방관리들의 수탈뿐 아니라 사찰내의 하층 승려 및 재가 신도들이 사찰의 중심세력인 고승대덕들에 대항하는 형상이었다는 것이다. 김사미라는 이름도 운문사의 김씨성을 가진 사미승(沙彌僧)이라는 견해도 이 같은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어쨌든 이 농민전쟁기간동안에 운문사에 전해지던 4비―신도비(神道碑), 행적비(行跡碑), 위답노비비(位畓奴婢碑), 중창사액비(重創賜額碑)―가운데 노비비와 사액비가 파괴되어버렸으니 이는 토지와 노비를 절에 예속시킨다는 내용이 이들 비에 담겨있었음을 보아도 타당한 것이다.

 

4비 가운데 행적비는 일연스님의 행적비일 것으로 짐작되는데 행적비도 전해지지 않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일연스님은 몽고간섭기인 1277년에 포산(포산)에서 이곳 운문사로 오게 된다. 이때 스님은 72세의 노년이었으며 이곳에서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인 『삼국유사』를 집필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운문사의 비로전 앞뜰에는 신라하대 9세기의 것으로 보이는 쌍탑이 서있다. 상층기단의 중대석에 탱주가 하나 조각되어 있는데 4면에 두구씩 팔부신중상이 새겨져 있다. 그 중에서 건달바는 공후(공후)를 연주하는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공후를 연주하는 건달바는 이곳 외에도 서산 보원사터 오층석탑의 건달바에도 있다.

 

이밖에도 운문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팔각석등이 금당 앞에 있으나 일반인들은 출입을 통제하기 때문에 들어갈 수는 없다. 운문사의 빼놓을 수 없는 명물 중에는 바로 우산을 펼쳐놓은 듯한 형상의 처진소나무이다.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된 소나무는, 키가 6m밖에 안 되지만 가지가 사방으로 10여m이상이나 퍼지면서 밑으로 처지기 때문에 땅에 닿지 않도록 지주로 받쳐 놓았다. 해마다 두 번씩 막걸리에 물을 섞어 약25말 정도를 밑거름으로 부어 준다 수령이 약400년인 이 소나무는 아직도 해마다 솔방울이 달리고 새가지가 뻗고 있어 신기함을 더해준다.

 

*운문사 입구의 소나무 숲

 

*소나무 숲

 

*벚나무 담장 길

 

*운문사 전경

 

*범종루

 

*범종루

 

*처진 소나무

 

 

*처진 소나무

 

*비각

 

*원응국사비

 

*설송대사비

 

*작압전

 

*鵲鴨편액

 

*석가여래좌상과 사천왕석주

 

*석가여래좌상

 

*사천왕석주

 

*사천왕석주

 

*만세루

 

*만세루 편액

 

*만세루 내부

 

*만세루의 대북

 

*만세루 천정

 

*관음전

 

*명부전

 

*명부전의 지장보살상

 

*오백전

 

*석가삼존불

 

*오백나한

 

*오백나한

 

*불이문

 

*동서삼층석탑

 

*서삼층석탑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상

 

*동삼층석탑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상

 

*팔부신중상

 

*건달바

 

*이목소

 

 

 

<2006.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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