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경주 분황사 유적

蔥叟 2006. 2. 27. 05:44

경주 분황사 유적

 

   분황사에는 경덕왕 때 본피부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 만든 무게 30만 6천7백근의 약사동상(藥師銅像)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원효가 입적한 후 그의 뼈를 갈아서 찱흙과 반죽하여 만들었다는 원효의 소상을 분황사에 모셔두었는데 설총이 아침문안인사를 올리면 원효의 소상도 설총을 돌아보았다고 한다. 이는 삼국말기에 소조불이 유행했던 사실과 도 일치하는 사실이다. 역시 전하지 않는 천수천안관음상(千手千眼觀音像)이 있었는데 영험이 많았다고한다. 삼국유사에 다음 이야기가 전한다.

 

   경덕왕 때에 한기리(漢岐里)의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나서 다섯살 때 갑자기 눈이 멀었다. 하루는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로 가서 왼쪽전각(左殿) 북쪽 벽에 그린 천수대비 앞에서 아이를 시켜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드디어 눈을 뜨게 되었다. 그 노래는 이러하였다.

 

   "무릎을 낮추며 / 두 손바닥 모아 / 천수관음전에 / 기구(祈求)의 말씀 드리노라 / 천개의 손, 천 개의 눈을 / 한 손을 놓아, 한 눈을 덜어 / 두 눈 감은 나에게 / 하나나마 주어 그윽이 고쳐주소서 메달리누나 / 아아, 나에게 베풀어주신다면 / 그 자비심 얼마나 크시리요"

 

 

<삼국유사 분황사천수대비 맹아득안(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조>

 

   분황사에는 또 지금가지도 사용되고 있는 외부는 팔각형 내부는 원형인 신라시대의 우물이 있다. 팔각형은 팔정도(八正道)를, 원형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을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의 유래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설화대로라면 삼룡변어정이 아니라 일룡변어정(一龍變魚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원성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795)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간 지 하루만에 웬 여자 두 명이 대궐 안들에 나아와 아뢰기를,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 청지(靑池) 두 못에 사는 용의 아내들이옵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우리들의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의 용 등 세마리에게 술법을 써서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에 넣어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컨데 폐하께서는 그 두사람에게 명하여 나라를 보위하는 우리 남편 되는 용들을 두고 가도록 해주소서" 하였다.

 

   왕이 하양관 (河陽館)까지 그들을 뒤쫓아가서 그들에게 친히 잔치를 베풀어주고 하서 사람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째서 우리 나라의 용 세마리를 잡아서 이곳까지 왔는가? 만약에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극형에 처할 것이다" 라고 하였더니 그제야 고기 세마리를 내어 바쳤다.

 

   고기를 세 군데에 놓아주도록 하였더니 놓은 곳마다 물이 한 길이나 솟고 용이 기뻐 뛰놀면서 가버렸다. 당나라 사람은 왕의 명철하고 거룩한 데 감복하였다.

 

 

<삼국유사 원성대왕(元聖大王)조>

 

   삼룡변어정 앞에는 고려시대 한문준이 지은 원효대사의 와쟁국사비의 비좌가 남아 있다. 이 비좌는 고려 숙종이 의상과 원효의 비문이 없는 것을 아쉽게 생각하여 한문준을 시켜 부석사에는 의상대사의 비를 분황사에는 원효대사의 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비는 조선 후기에 파괴되고 없어졋으나 비좌만 남아있다. 추사 김정희가 이를 보고 '차화쟁국사지비부(此和諍國師之碑趺)' 라고 친필로 음각하였다.

 

   원효는 분황사에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리고 말년에는 암곡의 고선사에서 오랫동안 주석하였으며 혈사(穴寺)에서 입적했다고 하는데 현재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분황사는 원효가 가장 많은 저술활동을 한 곳이었다. 우리 역사상 원효만큼 많은 저술활동을 한 이는 없었다.

 

   설총은 원효와 요석공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엄격한 골품제도가 유지되던 사회인데 진골 김시가 아닌 설씨가 어떻게 무열왕의 딸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있었을까? 일반적으로 신라의 6성은 6두품으로 알려져 있는데 6두품 출신인 원효와 진골인 교석공주는 무열왕의 허락 없이는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열왕은 왜 그들의 잠자리를 허락했을까?

 

   최근의 논문에 의하면 설씨녀의 묘지명(墓地銘)에 설씨 여인이 중국인 고위 관료와 결혼하여 문무왕때 중국으로 건너갔는데 원래 왕족(경주 김씨)이었으나 설 당에 녹읍(祿邑)을 받고 성을 설씨로 취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설씨는 곧 진골인 경주 김씨라는 것이다. 백제의 흑치상지도 본래는 왕성인 부여씨였지만 흑치당에 제후로 봉해지면서 흑치씨가 되었다.

 

   정씨, 이씨, 최씨 등도 중국의 왕족이 쓰던 성씨였지만 신라의 귀족들이 차용하여 쓴 것으로 보인다. 신라사회에서 중국의 대성을 쓸 수 있었던 사람은 왕족의 방계였다. 그러므로 신라 6성은 모두 김시라는 설명도 가능해진다. 특히 박씨는 김씨가 거의 확실한데 경주 바깥지역세 살면서 권력서열에서 멀어져 박씨로 칭하게 되었던 것 같다.

    

*분황사 전경

 

*삼룡변어정

 

*삼룡변어정

 

*삼룡변어정

 

*화쟁국사비부

 

*화쟁국사비부 명문

此和쟁國師之碑趺 金正喜 題記

 

*분황사 출토 석조

 

*석등 하대석

 

*초석

 

*초석

 

*초석

 

*초석

 

*여래입상

 

 

*당간지주

 

*당간지주

 

*당간지주의 귀부

 

 

<2006.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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