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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 보광전

蔥叟 2006. 2. 25. 06:54

경주 분황사 보광전

 

   분황사는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었다. 지금가지의 발굴조사결과에 의하여 분황사의 금당은 창건 삼금당을 비롯하여 1,2,3차에 걸친 중건 금당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현재의 보광전은 3차 중건 금당에 해당한다. 

 

*분황사 보광전

 

*분황사 보광전

 

   분황사 창건가람은 석탑 북쪽에 '品'자형 삼금당을 배치한 소위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였다. 중금당터는 석탑 남북중심축선상에서 동서 26.6m, 남북 15.4m,  면적 124평의 장방형 평면구조였으며, 동서 금당터는  석탑 남북중심축선을 기준으로 동서대칭지점에 배치된 동서 20.3m, 남북 18.0m, 면적 110평의 장방형 평면구조였다.

 

   삼국시대의 가람에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구조는 원래 고구려의 가람배치양식이었다. 하지만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의 전형은 동,서,북쪽의 삼금당이 중앙의 탑을 각가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 고구려로 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에서 고구려의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고구려의 그것과는 달리 중금당은 동일 남북중심축선상의 북쪽에서 남향으로, 동,서금당은 동 중심축선을 기준으로 좌우 대칭 지점에서 각각 남향으로 건립하여 삼금당 모두 남향으로 배치하였다. 또 삼금당 모두 석탑의 북쪽에 위치하도록 배치하여 고구려의 전형양식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즉 고구려의 양식을 받아들이되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독창적인 가람배치를 선보인 것은 새로운 신라양식의 출현이라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보광전 편액

 

*보광전 공포

 

   1차 중건 금당은 창건 중금당과 동일 지점에 중심을 두고 면적을 확장하여 건립되었다. 동서 28.4m, 남북 20.0m의 장방형으로 면적은 172평에 이른다. 1차 중건 금당이 언제 건립되었는지에 대한 직접적인 사료는 없지만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는 있다. 먼저 삼국유사의 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조에 의하면 "경덕왕대에 한기리에 사는 여자 희명의 아해가 난지 오년만에 갑자기 눈이 멀었다. 어떤 날 그 어머니가 아이를 안고 분황사 좌전 북벽화인 천수대비 앞에 가서 아이를 시켜 너래를 지어 빌었더니 마침내 눈을 떴다."는 기록이 있고 같은책 황룡사종 분황사약사봉덕사종조에는 "신라 제 35대 경덕대왕이 천보 13년 갑오에 황룡사종을 주성하니 ... 또 이듬해 을미(755)에 분황사의 藥師銅像을 주성하였는데 무게는 30만 6천7백근이요 장인은 본피부의 강고내말이었다"고 한다.

 

   먼저 앞의 기록에서 분황사 좌전이란 기록에서 좌전은 분명 우전을 존재를 전제로 하는 명칭이다. 따라서 경덕왕대 어느시점인지는 알 수없으나 이때까지도 분명 좌전과 우전 그리고 중전이라 불리던 삼금당이 존재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755년에 30만근의 약사동상을 주성하였는데 이는 황룡사 장륙존상3만5천7근인데 비하여 약 8.7배에 달하는 30만 6천7백근의 약사동상을 주조했다는 것은 10분의 1인 3만 6백7십근의오기일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거대한 약사동상을 안치할 큰 불전이 필요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따라서 1차 중건 금당은 경덕왕대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보광전 주악천인상 벽화

 

*보광전 주악천인상 벽화

 

   1차중건금당이 언제까지 존속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고려사 세가 숙종조의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상도 경주부 불우조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 숙종 6년(1101)에 왕은 원효에게 '大和諍國師'라는 시호를 하사하고 비석을 세워 그 덕을 기리라는 명을 내렸으며, 명종대에 이르러 평장사 韓文俊이 화쟁국사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이는 12세기가지도 분황사가 국가적 지원을 받아 건재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의 문신인 서거정(1420~148)과 어세겸(1430~1500)의 싯구(詩句)에서는 '경내 절반가량 민가가 들어찼다', '탑이 허물어졌다'라는 내용이 표현된 것으로 보아 15세기 후반에는 분황사가 이미 폐사되었거나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는 분황사 남쪽의 황룡사가 1238냔 몽고의 침입으로 소실될 때 운명을 함께한 것으로 보인다.

 

   2차중건금당은 13세기 전반에 1차 중건 금당이 소실된 이후 완전히 다른 형식으로 축소된 금당이 건립되었다. 2차 중건 금당의 건립시기는 몽고의 침입이 끝난 13세기 후반 이후부터 15세기 후반 사이의 어느 시점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보광전 돌계단

 

*보광전 기단석

 

   2차중건 금당은 석탑 중심에서 북쪽으로 36m, 동쪽으로 5m 떨어진 곳에 그 중심을 두고 방향도 창건 금당과 1차중건 금당의 남향과는 반대로 서향으로 건립되었다. 전체규모는 남북 11.5m, 동서 10.8m로서 면적은 38평이다. 172평의 대형 금당이 불과 38평의 작은 규모로 방향가지 바꾸었다는 것은 불교사상적인 측면에서 일대 변혁이 있었거나 폐사에 버금갈 정도로 절이 쇠락하여 소규모 금당을 중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분황사 금당은 보광전이며 3차중건 금당에 해당한다. 석탑 중심에서 북쪽으로 36m, 동쪽으로 5.5m 떨어진 곳에 중심을 둔 서향의 맞배지붕 단층건물이다.  내부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봉안하고 있다.  정면3칸 측면 2칸으로 면적은 13평이다.

 

   1998년 해체 수리시에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보광전의 중건 시기는 관해군 원년(1609)이며, 70여년이 지난 숙종 6년(1680)에 노화된 건물을 다시 중건했다고 한다. 또한 보광전에 536근의 청동으로 주성한 약사여래입상을 봉안했으며 수차례의 개금불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2차 중건 가람이 조선중기에 이르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으로 전소된 후 광해군 때에 이르러 다시 3분의 1로 축소되어 3차 금당의 중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보광전 수미단의 주악천인상 목조각

 

*보광전 원효대사 진영

 

<2006.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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