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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代 화엄종 사찰 - 불광사 대전

蔥叟 2018. 10. 14. 03:40

唐代 화엄종 사찰 - 불광사 대전

 

大殿

 

사찰의 지형에서 제일 높은 단에 위치한 대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으로 정면의 각 칸은 5,000mm 내외인데 제일 마지막 양측 협칸으로만 살창을 내고 나머지 칸은 모두 판문으로 처리하여 기둥과 주선, 문얼굴 등과 어우러진 축부(軸部)는 육중한 느낌을 주게 한다. 양측면과 배면에서는 우주만 노출되고 나머지 기둥들은 창방하부까지 두텁게 벽체로 마감되어 기둥은 벽체 속에 파묻혀서 보이지 않는다.

내부로는 또 사방으로 내진주를 배열하여 외진주와 퇴보로 결구되고 그 위로 우리나라의 우물천장과 비슷한 수법으로 천장을 마감하였는데 이는 당대(當代)의 남선사 대전과는 다른 수법이다. 이때 이 내부공간을 툇칸부분과 안쪽부분으로 분리하여 내조(內槽)공간에는 불상을 안치하였다. 뿐만 아니라 내부의 공간분할과 천장가구의 짜임 그리고 귀포의 짜임에 있어서는 처음 시도된 방법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완숙한 조화미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 건물은 당대(唐代) 건축 예술의 극치를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광사 대전은 정면 7칸, 측면 4칸의 홑처마 우진각지붕으로 규모가 웅장한데 특히 마당이 좁아 집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전면은 양쪽 퇴칸에 살창을 달고 나머지 3칸은 모두 2짝의 판문을 달았다. 공포는 주심포에서 다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형식으로서, 기둥 위에는 쌍빗보(2개의 하앙)를 올린 4단 2출목 주심포이고 공간포는 하부에 받는 접시받침도 없이 제2제공부터 공중에 장식적으로 짜인 듯한 2단 1출목이다. 처마를 길게 배내기 위해 출목도리의 간격을 넓혔으며 기둥 위뿐만 아니고 중간에 공포식 화반을 끼웠다고 봐야 할 것이다. 대신 귀포는 귀한대가 끼워지고 첨차가 길게 만들어서 +자로 결구되기 때문에 화려하고 튼실하다.

 

내부는 내 ․ 외진기둥의 높이와 직경 모두 같게 만들어 상부에 주심포와 포대공을 놓고 있는데 이것은 내진주 옆에는 벽을 쳐서 병풍식의 불감을 만들고 채소조상 30여존과 500나한을 모셨다. 지붕은 물매가 완만한 고대 건축의 표본이다. 수키와 없이 암키와만으로 지붕을 이었으며 막새기와를 사용했다. 용마루 양단에는 높이 3미터가 넘는 당식(唐式) 치미를 얹었는데 제작은 원대에 중수된 것이다.

이 대전의 포작과 지붕가구는 중국 건축의 대표작으로서 남선사 대전(782)과 예성 광인왕묘 정전(833년)에 이어 중국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건물이며 수많은 건축 교과서에 그 도해가 실려 있다. 이런 결구법은 송의 ‘영조법식(營造法式)’에도 일등재로 기록된바 포작의 총 높이가 기둥높이의 21분의 1로 외관이 웅장하고 장엄해 보인다. 이런 양식은 한, 당 시기의 고유양식으로 5대이후에는 사라지며 이후 건축은 화려하고 섬세해지는 경향을 띤다.

 

대전 안의 소상은 항마인의 석가모니불, 아미타불, 문수보살, 보현보살 등 35존에 이르는데 모든 표현이 당대의 품격을 지녔다. 또한 당대의 벽화로서 내진주 중 주두 위에 몇 폭의 공안 벽화가 남아있다. 그 중에서 가장 진귀한 것은 대전의 우측에서 두 번 째 칸의 인방에 그려진 것으로 인물이 모두 당대의 품격을 지녔다.

 

▲불광사 대전

 

 

▲불광사 대전

 

▲불광사 대전

 

▲불광사 대전

 

▲불광사 대전

 

▲불광사 대전 편액

 

▲불광사 대전 빗보

 

▲불광사 대전 빗보

 

▲불광사 대전 빗보

 

▲불광사 대전 공포

 

▲불광사 대전

 

▲불광사 대전 공포

 

▲불광사 대전 공포

 

▲불광사 대전 치미

 

▲불광사 대전 치미

 

 

 

<2018.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