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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사지원리 방단적석유구

蔥叟 2018. 10. 6. 09:27

단양 사지원리 방단적석유구

 

사지원리 방단 적석유구는 태장이묘라고도 불리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온달장군 묘라고도 전해진다. 돌을 쌓은 기술이 신라의 산성 축성법과 같아 대략 7세기경에 쌓은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의 정확한 성격은 파악하기 어렵지만 예로부터 신성시되었던 곳이었다. 방단 적석유구는 삼국시대 민간신앙과 관련해 한국의 정신사나 종교사를 구성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국내에는 유례가 드문 것이다. 태장이묘 인접지역에 소형 적석유구등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은 고구려계 적석묘군지일 가능성이 있다.

 

正西向[정서향]으로 산에 기대듯이 쌓은 이 돌무지는 正面部[정면부]와 北面部[북면부]는 거의 무너져 내렸고 南面과 東面의 일부분만이 原形을 갖추고 있다. 南面의 石築[석축]은 7壇을 이루고 있는데 위의 3단은 동남에 남아 있는 3단과 일치한다. 南面 7壇의 높이는 각각 95㎝[1단과 2단의 높이]75㎝, 90㎝, 50㎝, 65㎝, 30㎝이다. 석축은 화강암의 割石[할석 45㎝ × 12㎝정도]을 이용하여 높이 10M에 15M × 20M 의 基壇部[기단부]를 가진 壇[단]을 쌓았다. 단의 상층부에는 6개의 돌 쌓음과 1개의 선돌[Menhir]이 있다. 작은 할석을 이용하여 20㎝~130㎝의 높이로 돌 쌓기를 하였고, 선돌은 115㎝ × 40㎝ × 12㎝의 여성 선돌이라 했다. 1960년대만 하여도 계단은 분명하게 보였다. 1970년 새마을 사업할 때 많이 훼손되었고 돌은 2개 마을에서 석축 쌓는데 가져다 썼다.

 

태장이 묘에는 옛날부터 날이 가물면 석촌지역에 주민들이 모여서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지내는 사연인즉 태조 이성계가 이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현 사지원 2리 태장이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어서 아침에 일어나 산세도 좋고 내가자고 간 이 땅에 무엇인가 남겨두고 가겠다하여 가지고 있는 부장품을 놓고 거느린 군사로 하여금 돌 하나를 올려놓으라고 명하자 호위군사가 일인당 하나씩 올린돌이 현재의 태장이 탑이다. 70년대까지만 하여도 고구려의 장군총처럼 계단식으로 된 부분이 있었고 꼭대기에는 선돌을 세워두고 정월달이면 금줄이 쳐져 있었다. 현재는 무너져 완전 돌무덤으로 변했고 아직도 이곳에 기우제는 효험이 있다. 개를 잡아서 태장이 탑 꼭대기 위로 뿌리고 개울물을 퍼다가 개를 잡아서 태장이 탑에서 개장국을 해서 먹고 나면 꼭 비가 왔으며 아무리 가물 때라도 개의 피를 씻을 정도의 소나기가 한줄기라도 꼭 온 것이 주민들의 증언이다.

 

현재의 탑 앞으로는 포장도로가 개설되면서 진동에 의하여 허물어진 상태이나 이곳에 왕이 두고 간 부장품을 더럽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하늘이 더러움을 씻어주기 위하여 비를 내린다고 믿기 때문이다, 60년대까지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정월 보름에 지역 주민들이 모여서 마을 제를 올리는 곳이기도 했으며 산신제를 지내는 사람이 많았던 곳이다.

 

한편 이 유구가 고구려의 명장 온달의 묘로 추정하는 주장이 지역 향토사학자들로부터 전해지고 있다. 온달은 阿旦城[아단성 ; 온달산성]아래에서 전사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온달장군의 묘를 발견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물음에 단양군 향토사학자들은 史料[사료]의 빈약함과 기록의 모호성도 있지만 영춘 지역에 전해오는 온달관련 지명. 전승. 전설 등을 통해 묘 위치를 유추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나 자치단체의 의지 결여로 지적하고 있다. 또 온달은 역사적인 인물임에도 불구 『온달전』은 설화적 성격을 띠고 있어 위대한 장군에 앞서 바보 온달로 평가받고, 평강공주의 孝[효]등 교육적인 면에 무게를 실어왔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삼국사기』45열전에 기록된 『온달전』에는 고구려의 역사에 온달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는 온달 장군에 의해 축성됐다고 전해지는 온달산성 주면 지역에는 『온달 성 쌓듯 한다』『온달 반이나 따라 가거라』『온달 성안에 백로 쫓아내듯 한다』라는 속담과 『온달 발자국』『윷판바위』『온달동굴』『장수물』등 온달관련 지명이 50여개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온달성 아래의 고구려의 대표적인 장묘문화인 장군총이 1,500여년간 주인을 찾지 못하고 묻혀 있는 점은 온달장군의 역사적인 면보다 설화적인 허구에 밀려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특히 장군총의 묘탑 위치가 일반상식에 어긋나게 산골짜기 도로변에 놓여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는 요인으로 있다.

 

이 같은 숙제를 풀기 위해서는 우선 온달전의 기록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의 온달전에 온달이 出征[출정]에 앞서 왕에게 맹세한 대목을 보면 『계립령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기록되고 있다. 당시 계립령과 죽령은 고구려군과 신라군이 대치한 소백산맥에 놓여있어 이 지역을 점령하면 장차 통일로 이어지는 절대 전략 요충지라고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여 향토사학자 윤 수경씨는 온달산성 주변 지명을 인용해 온달장군은 온달산성 아래 大陣목[대진목]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참패하자 군사들을 장방터에 집합시킨 후 쉬는 돌을 거쳐 이동, 산을 넘어 퇴각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온달장군은 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하들을 퇴각 시킨 후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 들어 온몸에 화살을 맞자 부하들이 사지원리[당시 보수원 ; 부상자들이 치료받던 곳]로 후송하고, 죽음을 앞둔 온달은 자신의 무덤을 적군의 진격지에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해 죽어서라도 고구려를 지키겠다는 장군의 충정이 음미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단양군 향토사학자들은 장군총의 위치가 당시 보수원에서 2㎞떨어진 고구려 왕검성으로 가는 大路[대로]임이 밝혀짐에 따라 부하들은 이곳 태장에 온달의 시신을 묻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이성계의 태조탑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조선시대에 태조탑이라고 명명해 묘탑의 훼손을 막기 위한 것이고 묘탑에는 온달장군 묘를 입증할 수 있는 매장물이 발굴될 가능성이 많다고 단양군 향토사학자들은 역설하고 있다. 사지원리 泰葬[태장]에 위치한 고구려 장군총 모양의 묘탑 주인공이 바로 온달장군이라는 주장이 점점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묘탑 주변에는 온달과 관련된 전승과 지명이 80여개나 전존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특히 영춘면 온달산성에서 4㎞이내 47개 자연 마을 중 77%인 36개 마을이 전쟁 용어인데다 온달과 관련된 전설과 민담이 전해져 내려와 그동안 일부 학자들에게 제기된 온달장군 전사지인 서울 한강 부근의 아차산성 주변 지역과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또 주변의 지명을 보더라도 전쟁 용어인 장군목[영춘면 하리 산 62번지], 大陣[대진]목, 꼭두방 터, 중간방 터, 아랫방 터, 자삽[야전 탈의실], 最佳洞[최가동 ; 살아 있을 때 마지막으로 보는 마을], 쇠골[전쟁 병기를 제작하는 곳], 온포동[온달이 석포를 날린 곳], 고드미 재, 군간, 장수물, 피마루, 휴석동[쉬는 돌], 윷판바위, 이동산, 둔친 머리, 피바위골, 온달동굴, 장방터 등 80여개가 산재해 있다.

특히 영춘면 사지원리 태장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온달장군 전사지를 밝히는데 귀중한 지명으로 고구려 대표적 묘장 문화인 장군총 모양의 묘탑과 인근에는 온달장군의 발자취를 比定[비정]할 수 있는 傳承[전승]지명이 존재하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장군총 모양의 적석무덤은 20M × 20M의 10층[추정]피라미드형으로 도로변 절벽을 깎아 세운 듯 화강암과 석돌로 축조한 것이 특징이다. 돌의 크기는 일정치 않으나 대략 1층~6층은 화강암을 규격에 맞게 다듬은 흔적을 보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작아 진듯하다. 현재 묘탑 전면은 관리 소홀로 심하게 훼손돼 외형상 식별은 어려우나 뒤편에는 고구려 대표적 적석무덤을 상징하는 계단식으로 조성돼 초기 장군총 모양의 성격을 띄고 있다.

 

단양군 영춘면 태장에 있는 묘탑에 석실로 통하는 입구가 있었다는 주변 마을 사람들의 증언에 따라 장군총 모양이다. 이 묘탑은 고구려 대표적 적석 무덤인 것이 지역 향토사학자들에 의해 최초 확인되었다. 따라서 이 묘탑의 주인공은『삼국사기』에 기록된 온달장군의 戰死地[전사지]인 阿旦城[아단성], 즉 현재의 영춘면에 있는 온달산성을 나타내고 있고, 온달과 관련된 주변 지명을 종합해 볼 때 온달장군의 묘탑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영춘면 사지원리에 거주해온 곽병윤씨[1999년 70세]는 『지난 40년대쯤 이 묘탑 앞부분에 조그마한 입구가 있어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 보았지만 끝이 막혀 있어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곽씨는 『지난 70년대 초 새마을 운동 때 석축 공사에 쓰려고 외지인들이 묘탑에 있는 돌을 대량으로 가져갔다』고 덧 붙였다. 또 박창복[1999년]사지 원 이장은 『30여년 전에 작고한 천구봉씨가 이 묘탑을 관리해 훼손을 막았으나 천씨가 사망한 후 관리 소홀로 묘탑이 무너지고 도로공사로 인해 묘탑 1/3이 훼손됐다』고 말했다. 현재 묘탑 앞부분이 크게 훼손돼 석실 입구를 확인 할 수는 없지만 기둥 모양의 장대석이 5~6개쯤 파손된 채 어지럽게 놓여있어 석실로 이어지는 입구가 있었다는 주민들의 증언을 뒷받침하고 있다. 고구려의 대표적 墓葬[묘장] 문화인 積石[적석]무덤은 압록강 중류의 通衢[통구]지방과 桓仁[]지방, 그리고 대동강 유역의 평양 지방에 주로 밀집 분포돼 있다. 특히 이번에 발견된 묘탑 주변은 평지에 있는 타 지역 적석무덤과는 달리 협곡에 위치하고 있고 묘탑 위치가 당시 신라군이 고구려 왕검성을 진격하기 위한 길목, 또한 묘탑 주변에는 보수 원[야전병원]과 시봉 터[부하들이 온달장군을 모신 곳]가 발견돼 부하들이 부상당한 온달장군을 모시고 죽은 후 묘탑을 축조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온달묘설에 대한 반론도 강하다. 태장이 묘가 온달장군의 무덤이라는 주장은 온달산성과 이 무덤에 연관성이 있다는 것이고 또한 온달장군이 전사한 아단성을 아차산성이 아닌 온달성으로 보는 견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먼저 이 무덤의 양식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태장이 묘는 11단 적석총이다. 이는 무척 대규모의 적석총이다. 그런데 온달장군이 전사한 6세기 말에 고구려에서는 적석총의 형식을 한 무덤이 제작되지 않았다. 적석총이라는 무덤 양식은 주로 고구려의 위나암 시대에 고구려의 귀족층의 무덤으로 많이 지어졌으며 평양천도를 전후하여 점점 흙무지 돌널무덤의 형태로 고구려의 무덤 축조 양식이 바뀌어 가면서 사라져 간 무덤 축조 양식이다. 특히 한반도에는 적석총이 거의 만들어 지지 않았다. 물론 한반도 이북에 미천왕 때부터 장수왕 때까지 만들어진 적석총이 존재하지만 위나암 시대보다는 그 규모가 작다. 한반도 이남에는 옛 고구려군이 주둔하고 있던 경상북도 일대에 몇 기가 존재하고는 있지만 이것은 광개토대왕, 장수왕 때 만들어 진 것으로 고구려 말기인 평원왕, 영양왕 때에는 적석총이라는 무덤 축조 양식이 아예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적석총이 평양천도를 즈음해서 사라진 것은 고구려의 무덤 축조 양식이 평양 지역의 전통적인 무덤 축조 양식인 흙무지 돌널무덤으로 바뀌면서 흙무지 돌널무덤보다 일손이 많이 가고 제작과정이 복잡한 적석총을 만드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구려의 옛 수도인 위나암 일대에서 평양천도 이후에 적석총이 제작되었을 지도 모르지만 이미 6세기 말에는 적석총은 모습을 감추었다. 따라서 6세기 말의 사람인 온달장군은 이 무덤의 피장자가 될 수 없다. 또한 태장이 묘는 4-5기의 적석총이 뭉쳐있는 형태로써 이 무덤은 한명이 아닌 여러 명의 무덤인 것이 확실한 만큼 온달장군 혼자의 무덤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

 

▲방단적석유구 받침석

 

▲방단적석유구 받침석

 

 

<2018. 9.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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