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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여운 - 서산 보원사터 당간지주

蔥叟 2018. 4. 7. 09:37

백제의 여운 - 서산 보원사터 당간지주

 

절에 대한 역사는 전혀 전하지 않으며 현재 넓은 절터만이 있다. 보림사(寶林寺)에 있는 보조선사 체징(普照禪師 體徵)의 탑비에 “체징이 보원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827년)”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원사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후 최치원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에 화엄종을 주종파로 하는 큰 사찰 중에 보원사를 언급하고 있다. 975년에 법인국사 탄문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고, 《고려사》에는 1530년에 보원사 계단(戒壇)에서 경율시험을 봤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원사가 상왕산에 있다”고 하여 16세기까지 계속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619년에 발간된 서산과 태안의 지방지 성격을 갖는 《호산록》(湖山錄)에서 보원사가 강당사(講堂寺)로 바뀐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1871년에 발간된 《호서읍지》(湖西邑誌)에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철조여래좌상의 양손이 없다고 기록하고 있어 이 시기부터 사세가 기울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는 절터 동쪽에 있으며, 70cm정도 간격을 두고 마주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으나, 바깥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띠를 새겼다. 기둥의 윗부분은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모를 둥글게 깎아 놓은 형태이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폭이 약간 넓어져 안정감이 느껴진다. 지주의 마주보는 안쪽에는 꼭대기에 네모난 홈을 중앙에 팠고, 아래부분에도 네모난 구멍을 뚫어 당간을 고정시키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치던 받침돌은 직사각형으로 2단이며, 윗면의 중앙에는 당간을 끼우기 위한 둥근 구멍이 파여져 있다. 양식과 조각수법이 화려하고 장식적이며 발달된 모습이어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인다. 주변의 유물들이 통일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보원사터 당간지주

 

▲보원사터 당간지주

 

▲보원사터 당간지주

 

 

 

<2018. 2.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