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0년 역사의 신성도시 - 아누라다푸라
Anuradhapura
아누라다푸라는 2,500년 전에 스리랑카 최대의 도시였다. 그 문명을 상징하기라도 하듯 거리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탑은 하늘을 향해 장대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고, 수많은 조각은 어느 것이나 부드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불교는 이 지역에서 스리랑카 전역으로 그리고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를 비롯한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다. 이 지역에서 번영했던 왕조는 매우 수준 높은 문명을 갖고 있었다. 지금도 사람들이 쓰고 있는 관개 시설이나 상, 하수도는 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누라다푸라에서 번영했던 이 왕조는 남 인도에서 쳐들어온 침입자와의 거듭된 전쟁 끝에 1,400여 년에 걸친 영화의 막을 내리게 된다.
아직도 스리랑카에서는 민족 간의 문제가 끊이지 않지만 분쟁의 시초라 할 수 있는 도시는 마치 그런 일 따위는 잊은 듯이 평화로운 전경으로 여행객을 맞아준다. 스리랑카 방방곡곡에서 순례하러 온 가족 일행과 근엄한 표정으로 경을 외우는 수도승, 나무 위에서는 원숭이들이 장난을 치며 오가고, 한가하게 오가는 우마차는 마치 유구한 시간 속을 지나는 듯하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성품도 참으로 온화하다. 불교의 신성한 공기가 마치 이 땅에서 분쟁을 없애버린 것 같다고나 할까. 아누라다푸라. 이 도시는 여행객들에게 투명하고 조용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기원전 377년부터 서기 1017년까지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 최대도시였으며 불교의 중심지였다. 이 불교의 중심은 스리랑카를 넘어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전 아시아로 퍼져 나가면서 아누라다푸라는 아시아 불교의 중심이었다. 당시의 아누라다푸라의 인구가 50만 명이었다고 하니 짐작 그 이상의 규모였다. 12세기 가장 번성했다고 전하는 크메르왕국의 앙코르 톰의 인구가 10만 명으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고 전하는데, 그 보다도 최소한 1세기 전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의 인구는 그보다 다섯 배나 많았다는 것이다.
아누라다푸라가 이렇게 대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싱할라 왕조 최초로 불교를 받아들인 데바 남피아팃사왕Deva Nampiya Tissa BC307~267에 의해 도시의 기본적인 시설이 갖추어 졌기 때문이다. 지역 자체가 드라이 존Dry Zone으로 불리는 건조지대로 계절적 몬순기Monsoon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리는 지역이라 농사를 짓기에는 담수능력을 갖춘 많은 저수지가 필요했기 때문에 왕은 통치를 위해서 우선적으로 치수사업에 치중하였다. 팃사웨와Tissa Wewa저수지와 누와라 웨와Nuwara Wewa저수지 등이 이때 건설되었고 이러한 치수사업으로 인해 도시의 인구 부양력을 증대 시킬 수 있는 풍부한 농토를 만들었던 것이 고대 대도시로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
아누라다푸라는 싱할라 정통 왕조의 수도로 번영을 누리다가 남인도 타밀족인 출라왕조에 쫓겨 폴론나루와로 이전하기 전까지 2,394년간 번영했던 대도시로 존재했다. 특히 서기 4세기 인도에서 건너온 치아사리를 정통 왕권을 상징하는 옥쇄로 받들며 불치를 모실 불치사를 조성하고, 매년 불치제를 지냈다. 아울러 이미 BC3세기에 조성된 저수지 및 도시를 관통하며 흐르게 만든 관개수로와 그 물을 농토로 흐르게 하는 당시의 발달된 수리기술을 엿볼 수 있다.
아누라다푸라는 ‘오래된 도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도시가 최초로 싱할라 왕조의 수도가 된 시기는 BC 377년 ‘판두 카바야’왕Pandu Kabbaya BC437 ~ BC367 재위기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수도로서 발전된 시기는 기원전 3세기 후반 데바 남피아 팃사왕Deva Nampiya Tissa 왕 BC307~267이 통치하였던 시기로 이 시기에 불교가 인도로부터 전해지고, 팃사웨와라는 거대한 저수지가 건설되면서 아누라다푸라는 화려한 고대문명의 중심이 되었다. 이런 번영은 결국 운명적인 경쟁자였던 이웃나라 타밀과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수도가 함락되고, 약탈당하고, 다시 전쟁을 통해 재탈환하는 비극의 역사는 무려 1,400년 이상 반복되었다. 물론 역사시대 이전의 이야기인 라마야나가 사실이라면 스리랑카가 오히려 인도를 많이 침략한 것이 된다. 그러나 역사시대 이후의 기록에 싱할라의 남인도 공격은 몇 차례일 뿐이고 기록의 대부분은 남인도 타밀족이 스리랑카를 침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잦은 침략으로 실제 아누라다푸라는 108년간 타밀의 지배를 받기도 하였다. 이렇게 끝없는 전쟁을 통해 함락과 재탈환이 반복되는 역사였지만 1017년 타밀의 아누라다푸라 함락 후 아누라다푸라는 싱할라에 의해 재탈환된 적이 없다.
▲아누라다푸라의 유적
▲아누라다푸라의 유적
▲아누라다푸라의 유적
▲아누라다푸라의 유적
▲아누라다푸라의 유적
▲아누라다푸라의 유적
<2018. 1. 15>
'◈인도아대륙문화순례◈ > 스리랑카문화권' 카테고리의 다른 글
1,600개의 돌기둥 - 아누라다푸라 로바마하파야 (0) | 2018.02.20 |
---|---|
2,300년의 역사 - 아누라다푸라 스리 마하보디 사원 (0) | 2018.02.19 |
스리랑카 불교 최초 전래지 - 미힌탈레 신하 포쿠나 (0) | 2018.02.17 |
스리랑카 불교 최초 전래지 - 미힌탈레 회의실 (0) | 2018.02.16 |
스리랑카 불교 최초 전래지 - 미힌탈레 석비 (0) | 2018.02.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