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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蔥叟 2018. 1. 21. 20:25

영주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이 불상은 강가 바위면에 본존불과 그 좌우에 서 있는 보살상을 각각 새긴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이다. 본존불은 상당히 큼직한 체구로 장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큼직한 코, 다문 입, 둥글고 살찐 얼굴에서 불상의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가슴은 당당하고 어깨의 굴곡과 손모양이 발랄해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싸고 흘러내린 옷은 장중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 바위를 그대로 이용하여 연꽃무늬와 불꽃무늬를 새긴 광배와 높게 돋을새김한 연꽃무늬의 대좌(臺座) 등은 장중한 불상의 특징과 잘 조화되어 더욱 듬직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본존불은 두툼한 옷자락이 온몸을 덮고 앞가슴의 옷자락은 U자 모양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삼국시대 불상이 지닌 간다라적인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왼쪽 보살상은 둥글고 풍만한 얼굴이다. 가슴이 넓으며 왼팔은 어깨 위로 걸치고 오른팔은 배에 대었는데 강한 남성적 기질을 느낄 수 있다. 오른쪽 보살상은 왼쪽 보살상과 거의 같은 수법이다.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손에는 보병(寶甁)을 들고 있으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점 등이 다를 뿐이다. 이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흐름을 잘 보여주는 사실주의적 불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1천3백여년 전 신라 시대에는 아늑한 절터였겠건만 이제는 차들이 다투어 달리는 길가 언덕위에서 풍상의 세월을 회고하고 계신다. 봉화의 북지리 마애불, 그리고 충주 봉황리 햇골산 마애불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3기밖에 없는 귀한 불상이다. 불상의 특징은 시무외여원인의 좌상이라는 점이다.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로 서기 650년을 전후한 시기까지, 즉 삼국시대에는 시무외여원의 입상이 주로 제작되었다. 경주의 배리삼존석불입상이나 서산 마애삼존불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리고 통일 직후인 650년부터 700년 사이에는 시무외여원인의 좌상이 제작되는데 그것이 바로 가흥동 마애삼존불과 봉화 북지리 마애불, 그리고 충주 봉황리 햇골산 마애불이다. 그리고 700년이후에는 항마촉지인과 설법인 등의 불상이 만들어지고 연화대좌가 등장하며 750년 이후에는 석굴암 본존을 모방한 삼단대좌가 갖추어진 불상이 주로 만들어진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선진 문물이 전래되면 일단 수도(首都)에서 먼저 꽃을 피우면서 서서히 지방으로 확산되는 것이 문화 전파의 원리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신라의 변방 지역인 이곳 태백산 주변에서 이 같은 형태의 불상이 제작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점은 신라뿐 아니라 백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백제의 수도인 부여나 공주 인근에서 백제의 불상은 없다. 아니 있긴 있으나 소규모의 금동불은 있지만 서산 마애불을 비롯한 태안 마애불이나 예산 사면석불 같은 대형의 작품들이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불상이 제작되던 시기에 이곳은 선진문화가 수도로 전해지는 교통로상의 중요한 위치일 것이라는 설만이 제기되었을 뿐이다. 백제의 석불들도 수도인 공주나 부여에서 당나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곳 가흥동이나 북지리, 봉황리는 신라에서 고구려로 통하던 중요한 지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석을 하여도 의문은 남는다. 그러면 왜 이와 같은 양식의 불상이 수도에는 없는 것일까? 문화가 전파되면서 변행된 것일까? 의문을 풀려지지 않는다.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가흥동 마애삼존불좌상

 

▲본존불

 

▲본존불 상호

 

 

 

<2017. 12.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