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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민이 살던 태고의 집 - 고성 왕곡전통마을

蔥叟 2017. 8. 24. 08:39

평민이 살던 태고의 집 - 고성 왕곡전통마을

 

왕곡마을은 양반이 아닌 평민들이 살던 마을이다. 소박하고 담백한 한옥이 허물없이 모여 앉아 마을을 이루었다. 때문에 여느 한옥마을처럼 굳이 어느 한 집만을 특별히 찾아 나설 필요 없이 마을과 함께 어우러진 한옥을 느긋하게 둘러보면 좋다.

 

이 땅에 처음 사람이 집을 짓기 시작했을 때 집의 중심은 부엌이었다. 동그랗게 생긴 움집 한가운데 화덕을 만들고, 여기서 밥을 짓고 겨울 추위를 녹였다. 가족이 모두 불가에 둘러앉아 마주하고 있으니 부엌일에 여자와 남자가 따로일 수 없었다. 남녀가 평등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 문명이 발달하고 문화가 정교해지면서 부엌은 집의 변두리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조선 시대로 오면 부엌은 안채의 한 귀퉁이로 완전히 밀려나는 처지가 되고 만다. 그리고 높은 사랑채를 지어올린 사내들은 집의 중심을 차지하고 앉아 거만하게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것이 우리가 아는 전통 한옥이다. 그런데 오래전 집의 역사가 시작되던 그때처럼 부엌이 집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곳이 있다.

 

고성의 양근 함씨(陽根 咸氏) 입향조로 알려진 함부열(咸傅說, ?~1442)은 이성계가 공양왕을 폐하자 은둔을 선택한다. 두문동 72인 중 한 명으로 엄혹한 시절을 피해 이곳으로 오던 함부열도 여기 어디쯤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멀리 바다처럼 출렁이는 상념을 다스렸을 것이다. 이성계의 편에 섰던 형 함부림과도 결별해야 했으니 마음속의 통곡이 작지 않았을 것이다. 정절을 지키려는 여인의 마음이 아니었을지. 그러고 보면 그를 설악산 발치에 뿌리내리게 한 것은 그의 마음을 닮은 설악산일지도 모른다.

 

함부열은 인근 마을인 금수리로 들어갔지만, 이후 함부열의 둘째 아들인 함영근(咸永近)이 지금의 왕곡마을에 들어오면서 양근 함씨의 동족마을이 시작됐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은 한옥마을은 거의가 양반 마을이지만, 왕곡마을은 그렇지 않다. 조선 시대 내내 누구도 관직에 나가지 않은 탓이다. 이 때문에 도무지 뜻을 짐작하기 어려워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당호도 눈에 띄지 않는다. 또 거창하지 않은 택호에서는 사람냄새가 물씬 난다. 관직을 받은 적이 없으니 택호라야 그저 '논건너집', '누렁개집', '큰상나말집' 이런 식이다. 어딘지 어수룩한 친근함이 묻어난다. 그런 생각 때문인지 여느 한옥마을보다 마을이 훨씬 고즈넉하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평화로움의 견고함이다.

 

함씨보다 100여 년 늦게 이곳에 들어온 또 하나의 성씨 강릉 최씨(江陵 崔氏)가 마을의 다른 한 축을 이룬다. 이후 함씨와 최씨 두 성씨가 서로 교류하며 하나가 되어 이곳의 전통 한옥을 굳건히 지켜 오고 있다. 두 개의 성씨가 나란히 마을을 만들어 왔다는 점에서는 경주의 양동마을과 비슷한 듯하지만 두 마을은 확연히 다르다. 양반집과 양반을 뒷바라지하는 사람들의 거주공간이 명확히 구분되는 양동마을과 달리 이곳에서는 모든 집들이 위아래 없이 이웃이 되어 하나가 된 마을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마을이 성취해 온 평화의 밀도가 양동마을보다 훨씬 촘촘하다. 마을에 들어섰을 때의 안온함에는 숨은 내력이 있었던 것이다.

 

왕곡마을은 양반이 아닌 양민이 살아온 곳이어서 양동마을의 향단이나 관가정처럼 이 집만이 특별하다 할 만한 집이 없고 모두 그만그만하다. 특별히 어느 집을 내세워 집안의 내력과 건축적인 의미를 미화할 필요가 없는 민속주택이니, 굳이 어느 한 집을 국가 문화재로 지정할 까닭도 없었다. 마을 전체를 중요민속문화재 제235호로 지정한 연유다. 그래서 한옥을 하나하나 떨어뜨려 감상하기보다는 마을 전체를 하나로 묶어, 그 안에서 이루어지던 삶을 더불어 감상하는 편이 좋다.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고샅길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왕곡전통마을

 

 

 

<2017. 7.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