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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산문의 고향 - 장흥 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蔥叟 2017. 1. 1. 05:31

가지산문의 고향 - 장흥 가지산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


창성탑 아래쪽에 탑비가 남아있다. 탑비는 비문과 귀부 및 이수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인 김영(金穎)이 짓고, 글씨는 김언경(金彦卿)이 썼다. 그런데 창성탑비의 전반부 6행은 곤미현령 김원이 구양순체로 쓰고 6행 중간 이후부터는 김언경이 저수량체로 쓰고 있으며 특히 비로자나불의 주조사실 기록 부분이 김언경의 글씨로 씌어져 있다. 탑비에 의해 보조선사는 804(애장왕 5)에 태어나 880(헌강왕 6)에 타계했음을 알 수 있으므로, 부도의 제작연대는 880년대로 추정되고 탑비는 884(헌강왕 10)에 세워졌다. 제작연대가 비교적 분명하므로 통일신라 말기의 석조물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승탑과 비의 주인인 보조선사 체징은 속성이 김씨로 층남 공주 사람이다. 선사의 대대로 이어 내려오는 훌륭한 집안 혈통과 태어날 무렵의 신기한 일화, 큰 산이 우뚝 서있는 듯한 모습, 강물처럼 자비롭고 온윤(溫潤)한 기상, 스승을 찾아 경전을 공부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비문(碑文)에 실려 있다. 전등(傳燈)의 기록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가지산(迦智山) 도의(道義)대사는 당나라의 서당지장(西堂智藏) 선사로부터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지는 법의 인가(心印)를 받고 돌아와 우리나라 선종(禪宗) 1조가 되었다. ()의 원리를 밝혀 드러내고 신비로운 법을 깨달아 가르침을 폈으나 당시 사람들이 좇지 않았으므로 염거(廉居) 선사에게 법을 부촉하고 설악산 억성사에서 은둔생활을 했다. 제자들에게 조사의 마음(祖心)을 전하고 그 가르침(師敎)을 열어 보였으니 우리나라 선()의 경계와 바른 깨달음의 법은 그 연원(淵源)이 이로부터 비롯된다. 체징 대사는 827년 가량협산(加良峽山) 보원사(普願寺)에 이르러 구족계를 받았는데 한번 계를 설하는 마당[壇場]에 들어가 7일 밤을 정진하였다.

 

그때 홀연 이상스런 꿩 한 마리가 날아들었는데, 옛일에 밝은 어떤 스님이 이는 진리의 임금이 앞으로 일어날 징조라고 풀이했다(우리나라 은 도의가 들여오고 체징에 이르러 비로소 신라에 전파되기 시작함) 구족계를 받은 선사는 보원사를 떠나 염거 선사의 문하로 들어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맺었다. 염거에게서 처음 법을 받은 뒤로는 선()의 현묘한 자취를 탐색하여 그 요체를 터득하는 것이 마치 막혔던 강물이 터지듯 거침없었고, 평탄한 길을 가듯 쉬웠다. 이에 선사는 염거선사 문하에서 한 마음을 청정히 닦고 삼계(三界)에서 벗어나기를 갈구했다.

 

헌안왕이 스님의 소문을 듣고 그 도()를 존중하여 꿈속에서조차 만나고 싶어하며 선()의 가르침을 열어 줄 것을 희망, 서울로 와주기를 간청했다. 여름 6월 장사현(長沙縣: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을 보내 차·(茶藥)을 예물로 갖고 찾아가 모셔오도록 했으나 스님은 굳이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다.

 

837년에 동학(同學)인 정육(貞育허회(虛懷:處會라고도 함) 등과 당나라로 구법의 길을 떠나 서해의 격랑을 헤치며 중국으로 건너갔다.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선지식들을 만나 불법을 강론하고 서로 도()를 비교하며 삼오주(三五州)를 주유한 끝에 본체와 현상은 다름이 없다[性相無異]’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는 우리 조사께서 설하신 가르침보다 나을 것이 없거늘 왜 멀리서 고생하겠는가?”라 하고 840년 봄 2월 평로사(平虜使)를 따라 귀국했다. 체징 선사의 귀국을 계기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마음을 기울이는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스님의 선풍(禪風)을 좇는 사미·법도(法徒)들 또한 전국 곳곳에서 몰려들었다. 마치 용이 번쩍이며 물결을 헤치고 달리듯 서로 뒤질세라 밀려드는 것이었다. 마침내 전남 광주의 황학(黃鶴:黃壑)이라는 이름의 절에 머무니 때는 859년이고 신라 헌안왕 즉위 이듬해이다.

 

그 해 겨울 10월 헌안왕은 또 도속사(道俗使)인 영암군 승정(僧正) 연훈(連訓)과 법사 봉신(奉宸풍선(馮瑄) 등을 보내 자신의 간곡한 뜻을 말하고 가지산(迦智山) [寶林寺]로 옮겨 주석(住錫)해 줄 것을 청했다. 스님은 마침내 주석처(住錫處)를 옮겨 가지산 산문으로 들어가 배우는 이들을 지도했다. 김언경(金彦卿)이 제자의 예를 베풀고 가까이 모실 수 있는 입실(入室)의 손님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자신의 봉록(俸祿)을 덜고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철() 25백근을 사서 노사나불 1구를 조성, 스님이 기거하는 절을 장엄하였다.

 

헌안왕은 교지(敎旨)를 내려 망수리 이남의 여러 집에서 함께 금() 160(비석글에는 160분으로 되어있음)과 곡식 2천곡(:10)을 내게 하여 절을 장엄하는 것을 돕고 일꾼들을 충당토록 했다. 경문왕 1(861)에 각처로부터의 시주로 절을 중창했다. 중창불사를 끝내고 서로 경하하던 낙성식 날 체징 선사가 자리에 임하자 찬란한 무지개가 법당 안으로 드리우고 그 빛은 다시 나뉘어 각 방들을 비췄으며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물들였다. 이는 견뢰(堅牢)라는 지신(地神)이 길상(吉祥)을 알리고 부처님께서 상서로움을 드러내 보여준 것이리라.

 

헌강왕 6(880) 초여름 422(비문에는 중순 2, 12) 오후 5시경부터 9시경까지 천둥 번개가 온 산을 진동시켰다. 23(비문에는 13) 자정 무렵 스님이 머무는 주지실 부근의 땅이 크게 흔들리더니 이튿날 새벽, 스님은 바른쪽으로 반듯이 누워 열반에 들었다.[右脇卽終] 제자 8백여 명이 스님의 법구(法軀)를 부여잡고 통곡을 하니 그 소리 골짜기에 가득찼다. 왕산(王山)의 송대(松臺)에서 다비식을 올린 뒤 탑을 세우고 부도를 모셨다. 헌강왕 9(883) 봄 그의 문인 의거(義車) 등이 스님의 행장(行狀)을 편찬하여 멀리 임금을 찾아뵙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해달라고 소청했다. 임금은 선종의 이치를 흠모하고 스님의 마음을 아름다이 여겨 담당 부서에 명을 내려 시호를 普照, 탑호를 彰聖, 寺額寶林으로 하도록 했다.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창성탑비


▲보조선사창성탑비

 

 

 

<2016. 1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