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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

蔥叟 2016. 10. 17. 07:16

경주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

 

營將柳公春浩淸德去思碑

惠懷屛翰 操潔氷玉

撫卒惠普 愛民恩篤

一規淸愼 萬姓歌頌

片珉不磷 氷寓釿誦

 

영장으로서 베푸신 은혜

지조는 빙옥처럼 맑았네.

군사를 어루만지며 널리 사랑했고

백성을 사랑하며 두터이 보살폈네.

한 법도를 청렴하게 행하자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였네.

여기 비석은 인멸되지 않아

영원히 우러러 흠모할 것일새.

 

光緖十九年癸巳七月立

都監 李基元

色吏 金潤軾

光武七年癸卯十二月下瀚 移改 立

重修都監 朴文植

色吏 裵興述

 

광서 19년 계사(1893) 7월 어느 날 세우다.

도감 이기원

색리 김윤식

광무 7년 계묘(1903) 12월 하순에 옮겨 세우다.

중수도감 박문식

색리 배흥술

 

비문에 나타난 글에서, 영장 류춘호가 부민 또는 군사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선정을 베풀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氷蘖’ 또는 ‘撫卒’ 등의 말이 보이는데, 군포 등을 징수할 때 많은 혜택을 주었으며 자신의 일에 매우 청렴하였고, 지방 군사를 잘 보살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그널데 한 달 사이에 류춘호의 비석이 2기나 세워졌다. 고종 19년(1893) 6월 鐵碑를 세워 공의 덕을 기렸고, 그 해 7월에는 石碑를 세웠다. 본래 2기의 비석은 한 곳에 나란히 건립된 것은 아니다. 1977년에 펴낸 文化遺蹟總攬을 보면 철비는 성건동 392-1번지에 있었고, 석비에 대한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이는 후손들의 증언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석비를 세울 때 도감을 맡은 사람은 이기원이고, 그의 증손이 지금 율동리 선두마을에 사는 이태수이다. 이태수씨의 말에 의하면, 석비가 성건동 민가 인근에 있었는데 아무도 관리하는 사람 없어 거름더미 속에 있었다. 그의 아버지 李鳳兆씨는 할아버지가 도감을 맡았던 비석이 방치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1960년대 후반 석비를 소달구지에 싣고 옮겨 소티고개 정상에 건립하였다. 그 후 누군가에 의해 철비도 이곳으로 다시 옮겨졌는데, 아마도 鄕都監 權達運의 후손이 건천에 사는데 그들이 옮겼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앞서 철비도 성건동에 있었다. 성건동은 조선시대의 경주지역 군사들이 주둔하던 곳이며 연병장이 있었다. 이 지역에 청렴한 영장의 비가 건립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본래 철비와 석비는 성건동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건립되었을 것이다. 주변에 민가가 들어서면서 비의 관리가 허술해지자 1957년 석비를 먼저 이곳으로 옮겼고, 1977년 이후 철비도 이건한 것 같다. 한편, 지금 석비와 철비는 이태수씨가 관리하고 있다. 이태수씨는 그의 증조부가 비를 건립할 때 도감을 맡았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비석 주변을 벌초하며 관리하고 있어서 주변 사람을 감동하게 한다.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

 

▲영장류공춘호청덕거사비

 

 

 

<2016. 10.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