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순례◈/서라벌문화권

신라의 쌍귀부 - 경주 숭복사 귀부

蔥叟 2016. 8. 30. 08:47

신라의 쌍귀부 - 경주 숭복사 귀부

 

이 귀부는 경주 외동읍 말방리의 숭복사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머리는 용의 형상이나 등에는 두 겹의 귀갑문이 새져져 있며, 짤막한 목에는 구슬 목걸이가 걸려 있다. 잔등 위에는 큼직한 비석받침을 마련하고 그 위에 별도로 만든 비석 받침대를 올려놓았다. 여기에 세겨진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비로 그 파편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碑石) 받침으로 쓰인 귀부는 한 마리로 된 것이 보통이나 이처럼 두 마리의 거북을 함께 조각한 예로는 경주 내남면 배리의 창림사터 귀부와 경주 암곡동의 무장사터 귀부 그리고 포한 비학산의 법광사터 귀부가 있다. 이러한 쌍귀부는 대체로 9~10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무장사 귀부가 애장왕(哀莊王) 2년(801년)에 만들었고, 숭복사 귀부가 진성여왕 10년(896년)에 된 것으로 보면 쌍귀부(雙龜趺)의 형식은 무장사귀부가 처음이고, 그 다음이 숭복사 귀부임을 알 수 있다.


숭복사 귀부가 동부동박물관으로 옮겨지고 현재의 박물관 자리로 다시 이전될 때까지도 귀부의 잔등 위에는 가로 1백25cm×세로54cm되는 장방형 홈만 남은 상태였다. 1978년 7월 학예연구실에서 숭복사터를 답사하던 중 금당자리 북쪽 약 30m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김종식씨(당시 67세)를 만났는데 이 절터에서 논을 갈다가 수습한 것이라면서 와당편 세 조각과 비석편 두 조각을 보여 주었다. 김씨의 전언에 의하면 비석편을 수습한 위치가 숭복사 금당터의 동남 모서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10m 가량 떨어진 동탑의 중간 지점이고 이 자리에 귀부가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김씨의 집 뒤뜰에는 인물상과 안상문이 새겨진 대석이 두 토막난 채 놓여 있었으며 이 절터에 있던 것을 옮겨다 놓은 것이라 하였다.


이동이 쉬운 와당과 비석편은 경주군 문화공보실에 매장문화재로 신고하고 대석은 며칠 후 박물관으로 옮겨왔다. 박물관에 옮겨온 파손된 두 조각의 대석을 맞추어 보니 하부에 약 2cm 가량의 촉이 나와 있어 조립할 수 있게끔 되어 있고, 대석 윗면에 비석 같은 것을 꽂을 수 있도록 파놓은 점으로 보아 귀부에 부속된 비석 받침임이 확실하였다. 이 대석을 숭복사 귀부의 비석받침으로 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무장사 귀부와 비교해 보면 무장사 귀부는 비좌와 거북받침이 한 개의 돌로 되었고 비좌 4면에 12십이지상을 새겼으나 숭복사 귀부는 비좌를 별석으로 만들고 안상문 안에 천인상이 있는 점만 다를 뿐이다. 숭복사터가 학계에 공식적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1931년 7월 大阪 金太郞氏에 의해 확인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실제로 귀부가 박물관 유물등록대장에는 1930년 10월 10일에 국고 귀속되었고 또, 당시의 신문 스크랩 내용으로 미루어 1930년대 후반에 이 절터가 알려지고, 1929년 겨울에 귀부가 옮겨진 것으로 보여진다. 귀부의 크기는 현고 77cm, 가로 1백80cm, 세로1백90cm이고 본 12021번으로 국고 귀속되었다.


▲숭복사 귀부


▲숭복사 귀부


▲숭복사 귀부


▲숭복사 귀부


▲숭복사 귀부

 

 

 

<2016. 8.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