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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의 사랑과 야망 - 단양 온달산성

蔥叟 2016. 10. 13. 10:26

온달의 사랑과 야망 - 단양 온달산성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둘레 683m. 사적 제264. 이 산성은 산 정상을 둘러싼 테뫼꼴로 벽은 안팎을 모두 비슷한 크기의 돌로 정연하게 쌓아올린 내외협축이다. 현재 성벽과 동,,북의 문지, 우물터, 배수구 등의 시설이 남아 있다. 산성의 나라로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멋지고 감동적인 산성은 보은의 삼년산성, 상주의 견훤산성 그리고 영춘의 온달산성을 꼽는다. 가히 한국의 3대산성이다.


온달산성은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인 온달이 신라가 쳐들어오자 이 성을 쌓고 싸우다가 전사하였다는 이야기와 관련되어 이름 불렸다. 하지만 발굴조사 결과, 신라 석축산성의 축성 방법이 확인되었고 신라 토기 등도 출토되어, 신라에 의해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산성은 해발 427m의 성산(城山) 정상부에 반월형(半月形)으로 축조된 테뫼식 협축(夾築) 산성이다. 성벽은 남고북저의 지형을 따라 쌓았는데, 남쪽 봉우리 정상부와 북쪽 벽의 안쪽에는 평탄한 땅이 자리하고 있다. 서북쪽은 남한강에 접한 가파른 절벽이며, 동쪽과 남쪽 성벽은 잘 다듬은 성돌을 쌓아 올렸다.

 

산성의 북동쪽 아래에는 온달동굴(천연기념물 제261)이 있고, 강 건너 주변 지역에도 휴석동 윷판바위, 장발리 선돌 등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또한 영월 태화산성(太華山城)은 온달산성에서 패한 온달을 위하여 누이동생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서 이 산성은 물론 주변 지역이 신라와 고구려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대치하였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온달산성의 축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 1,523, 높이 11척의 석축성으로 우물이 1개소 있다고 하였고,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온달이 을아조(乙阿朝)를 지키기 위해 축조하였다는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을아조는 단양군 영춘(永春)의 옛 지명인 을아단(乙阿旦)’으로,삼국사기에서 온달이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유시(流矢)에 맞아 사망하였다고 한 내용과도 관련된다. 하지만 아단성을 서울특별시 아차산성(阿且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기도 하다.

 

<溫達>, <高句麗><平岡王>時人也. 容貌龍鐘可笑, 中心則?{?/?/?}?{}?. {}?甚貧, 常乞食以養母, 破衫弊履, 往來於市井間, 時人目之爲<愚溫達>. <平岡王>少女兒好啼, 王戱曰: “汝常啼聒我耳, 長必不得爲士大夫妻, 當歸之<愚溫達>.” 王每言之.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평원왕, 或云平崗上好王, 평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 필자 주) 때 사람이다. 얼굴이 험악하고 우스꽝스럽게 생겼지만 마음씨는 밝았다.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항상 밥을 빌어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떨어진 옷과 신발을 걸치고 시정간을 왕래하여 당시 사람들이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다. 평강왕의 어린 딸이 곧잘 울었으므로 왕이 농담으로 네가 항상 울어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커서 틀림없이 사대부의 아내가 못되고 바보 온달에게 시집을 가야 되겠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녀가 울 때마다 이런 말을 하였다.

 

及女年二八, 欲下嫁於<上部>高氏, 公主對曰: “大王常語, 汝必爲<溫達>之婦, 今何故改前言乎? 匹夫猶不欲食言, 況至尊乎. 故曰: ‘王者無戱言今大王之命, 謬矣, 妾不敢祗承.” 王怒曰: “汝不從我敎, 則固不得爲吾女也, 安用同居? 宜從汝所適矣.”

딸의 나이 16세가 되어 왕이 딸을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니 공주가 대답하기를 대왕께서 항상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온달의 아내가 되리라고 하셨는데, 오늘 무슨 까닭으로 전일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도 거짓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하물며 지존이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임금은 농담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이 잘못되었으므로 소녀는 감히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화를 내어 말했다. “네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정말로 내 딸이 될 수 없다. 어찌 함께 살 수 있겠느냐? 너는 너 갈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

 

於是, 公主以實{}?釧數十枚繫肘後, 出宮獨行. 路遇一人, <溫達>之家, 乃行至其家, 見盲老母, 近前拜, 問其子所在. 老母對曰: “吾子貧具{}?, 非貴人之所可近. 今聞子之臭, 芬馥異常, 接子之手, 柔滑如綿, 必天下之貴人也. 因誰之侜, 以至於此乎? 惟我息, 不忍饑, 取楡皮於山林.” 久而未還, 公主出行, 至山下, <溫達>負楡皮而來. 公主與之言懷, <溫達>悖然曰: “此非幼女子所宜行, 必非人也, 狐鬼也, 勿迫我也!” 遂行不顧. 公主獨歸, 宿柴門下, 明朝, 更入, 與母子備言之. <溫達>依違未決, 其母曰: “吾息至陋, 不足爲貴人匹, 吾家至窶, 固不宜貴人居.” 公主對曰: “古人言: ‘一斗粟猶可舂, 一尺布猶可縫’, 則苟爲同心, 何必富貴然後, 可共乎?” 乃賣金釗{}?, 買得田宅奴婢牛馬器物, 資用完具.

이에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걸고 궁궐을 나와 혼자 길을 떠났다.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나 온달의 집을 물어 그의 집까지 찾아갔다. 그리고 눈먼 노모를 보고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절을 하며 아들이 있는 곳을 물었다. 늙은 어머니가 대답하였다. “내 아들은 가난하고 보잘 것이 없으니, 귀인이 가까이 할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그대의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필시 천하의 귀인인 듯합니다. 누구의 속임수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소? 내 자식은 굶주림을 참다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 속으로 간 지 오래인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소.” 공주가 그 집을 나와 산 밑에 이르렀을 때,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 공주가 그에게 자기의 생각을 이야기하니 온달이 불끈 화를 내며 말했다. “이는 어린 여자가 취할 행동이 아니니 필시 사람이 아니라 여우나 귀신일 것이다. 나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 온달은 그만 돌아보지도 않고 가버렸다. 공주는 혼자 돌아와 사립문 밖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다시 들어가서 모자에게 자세한 사정을 이야기하였다. 온달이 우물쭈물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말했다. “내 자식은 비루하여 귀인의 짝이 될 수 없고, 내 집은 몹시 가난하여 정말로 귀인이 거처할 수 없습니다.” 공주가 대답하였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도 방아를 찧을 수 있고, 한 자의 베도 꿰맬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만일 마음만 맞는다면 어찌 꼭 부귀해야만 같이 살겠습니까?” 말을 마치고 공주가 금팔찌를 팔아서 전지, 주택, 노비, 우마, 기물 등을 사들이니 살림 용품이 모두 구비되었다.

 

, 買馬, 公主語<溫達>: “愼勿買市人馬, 須擇國馬病瘦而見放者, 而後換之.” <溫達>如其言. 公主養飼甚勤, 馬日肥且壯. <高句麗>常以春三月三日, 會獵<樂浪>之丘, 以所獲猪鹿, 祭天及山川神. 至其日, 王出獵, 群臣及五部兵士皆從. 於是, <溫達>以所養之馬隨行, 其馳騁, 常在前, 所獲亦多, 他無若者. 王召來, 問姓名, 驚且異之.

처음 말을 살 때 공주가 온달에게 말하기를 부디 시장의 말을 사지 말고, 나라에서 쓸모가 없다고 판단하여 백성에게 파는 말을 선택하되, 병들고 수척한 말을 골라 사오세요.” 라고 하니 온달이 그대로 말을 사왔다. 공주는 부지런히 말을 길렀다. 말은 날로 살찌고 건장해졌다. 고구려에서는 언제나 봄 33일을 기하여 낙랑 언덕에 모여서 사냥하여 잡은 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 날이 되어 왕이 사냥을 나가는데 여러 신하와 5부의 군사들이 모두 수행하였다. 이 때 온달도 자기가 기르던 말을 타고 수행하였는데, 그는 항상 앞장 서서 달리고, 또한 포획한 짐승도 많아서 다른 사람이 그를 따를 수 없었다. 왕이 불러서 성명을 듣고 놀라며 기이하게 여겼다.

 

, <後周><武帝>出師伐<遼東>, 王領軍逆戰於<拜山{肄山}>?之野. <溫達>爲先鋒, 疾鬪斬數十餘級, 諸軍乘勝奮擊大克. 及論功, 無不以<溫達>爲策{}?. 王嘉歎之曰: “是吾女壻也.” 備禮迎之, 賜爵爲大兄. 由此, 寵榮尤渥, 威權日盛. <陽岡王{嬰陽王}>?卽位, <溫達>奏曰: “<新羅>, 割我<漢北>之地, 爲郡縣, 百姓痛恨, 未嘗忘父母之國. 願大王不以愚不肖, 授之以兵, 一往必還吾地.” 王許焉. 臨行誓曰: “<鷄立峴><竹嶺>已西, 不歸於我, 則不返也.” 遂行, <>軍戰於<阿旦城>之下, 爲流矢所中, {}?而死. 欲葬, 柩不肯動, 公主來撫棺曰: “死生決矣, 於乎, 歸矣.” 遂擧而窆. 大王聞之悲慟.

이 때, 후주의 무제가 군사를 출동시켜 요동을 공격하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배산 들에서 맞아 싸웠다. 그 때 온달이 선봉장이 되어 용감하게 싸워 수십여 명의 목을 베니, 여러 군사들이 이 기세를 타고 공격하여 대승하였다. 공을 논의할 때 온달을 제일이라고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그를 가상히 여기어 감탄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라 하고, 예를 갖추어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작위를 주어 대형으로 삼았다. 이로부터 그에 대한 왕의 은총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위풍과 권세가 날로 성하여졌다. 양강왕(양원왕, 或云陽崗上好王, 양강상호왕이라고도 한다. 필자 주)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기를 지금 신라가 우리의 한북 지역을 차지하여 자기들의 군현으로 만들었으므로, 그곳의 백성들이 통탄하며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대왕께서 저를 어리석고 불초하다고 여기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단번에 우리 땅을 도로 찾겠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 그가 길을 떠날 때 맹세하였다. “계립현과 죽령 서쪽의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습니다.” 그는 드디어 진격하여 아단성 밑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그를 장사지내려 하였으나 영구가 움직이지 않았다.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사생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가소서!”라 말하고, 마침내 영구를 들어 하관하였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였다.

 

<삼국사기 열전 제5 온달조>


온달과 평강공주에 얽힌 줄거리는 재미있는 이야깃거리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의 핵심을 바보였던 온달이 공주의 힘으로 훌륭한 장수가 되었다는 것으로 잘못 보고 있다. 그리하여 재능이 넘치는 명장 온달, 용맹한 장수 온달이라는 이미지가 엉뚱한 쪽으로 흘러갔다. 그런데 과연 그런 바보가 훌륭한 귀족들이 벼슬을 차지하던 고구려에서 큰 장수가 될 수 있었을까?

 

삼국사기에는 온달에 대해 얼굴이 못생겨 웃음거리가 되었으나 마음속은 환히 밝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을 사람들이 바보 온달이라 불렀을 뿐 진짜 바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온달은 가난한 살림을 꾸리며 때로는 밥 동냥도 하고 때로는 땔나무를 팔아 눈먼 어머니를 극진히 보살피던 착실한 청년이었던 것이다. 공주가 깊은 산속까지 온달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자, 온달은 성을 내며 이런 산골은 여자가 올 수 없는 곳이다. 사람이 아니고 여우나 귀신일 테니 나를 따라오지 마라고 하며 거절했다. 이처럼 온달은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 당당한 사내였다.

 

고구려 왕실이 과연 공주가 천한 사람에게 시집가도록 내버려 둘 정도로 자유로웠을까? 또한 고구려 왕실 법도상 공주를 귀족이 아닌 여염집에 시집가도록 정말 허용했을까? 둘 다 그때의 사정을 살펴보면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고구려는 귀족사회였다. 이 귀족들을 몰아내기 위해 장수왕이 많은 귀족들을 숙청하기도 했지만 그 뿌리가 쉽게 뽑히지 않았다. 고구려는 넓은 영토를 거느린 강국이었는데, 후에 밑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신라에게 최고 요충지이며 최고 생산지인 한강을 뺏기고 그 북쪽까지 내주는 재앙을 겪었다. 이때 민심의 단결을 도모하고 평민이라도 뛰어난 능력이 있으면 요직에 앉혀 나라의 힘을 기를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평민에게 공주를 시집보내는 것도 하나의 작전이 아니었을까? 온달이 1등 무사로 떠오르자, 왕은 그에게 공주를 시집보내고 이런 말을 퍼뜨려 한쪽으로는 평민들을 격려하고 한쪽으로는 귀족의 반발을 누그러뜨렸을 가능성이 크다. 원래 민중의식은 이런 데에서 피어나 이야기로 엮어지면서 강해지는 것이므로, 바보가 아닌 온달을 바보로 만들었다고 해서 나무랄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탓인지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단양에도 온달설화가 전하는 온달산성이 있다. 하지만 전설 말고는 온달이 한강을 넘었다는 기록도, 단양까지 쳐 내려갔다는 이야기도 확실하게 기록된 것이 없다. 아차산성에서 죽었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산성에는 동··북의 문터와 남·북 치성(雉城), 우물터, 수구 등의 시설이 남아 있고 3곳의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그 외에 신라시대고려시대의 토기 조각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성벽은 대부분 비슷한 크기로 다듬은 네모난 석회암 널돌을 면과 모를 맞추어 수직에 가깝게 쌓은 모습이다.바깥쪽 경사면 아래부터 일정한 높이까지 체성을 축조하고서물이 나가는 수구(水口)를 안쪽 바닥돌 아래까지 경사지게 만든 다음 위쪽에 체성의 안팎을 협축의 방식으로 쌓아 올렸으며, 성벽의 안은 돌로만 채웠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높이 68.5m, 너비 3.64m 정도가 남아 있고, 북문터와 회절부의 성벽은 계곡에 쌓은 것이어서 너비가 다른 구간에 비해 넓은 편이다.

 

치성은 북문터와 남문터 부근에 있는데, 아래부분은 길이 5.2m, 너비 5.3m, 높이 8m이며, 단면 삼각형으로 바닥을 보강하여 쌓았다. 문터 옆의 성벽에는 출수구가 있는데, 이를 중심으로 한 좌우 성벽과 북쪽벽 구간에는 아래부분에 보축이 이루어졌으며, 보축된 벽면 안에는 깬돌과 점토를 혼합하여 채워 넣었다. 남치성과 북치성은 같은 모습 같은 규모이다. 남문터는 남동향으로 경사진 지형에 자리하였는데, 규모는 길이 6m, 너비 3.9m로 북문터와 같다. 동문터는 너비가 7.3m으로, 현문식(懸門式) 구조로 설치되었으나 뒤에 암문(暗門)으로 사용되고서 메워진 것으로 밝혀 졌다. 배수구는 입수구, 배수로, 출수구를 연결시켜 만들었는데, ·출수구 모두 사다리꼴 형태이며, 출수구가 입수구에 비해 약간 크다. 배수로의 바닥에는 널돌을 놓았고, 돌틈 사이를 점토로 메워 성벽 속으로 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하였다.


문터 입수구 양쪽에서 확인된 유물 포함층의 맨 밑바닥층에서 6세기 중엽 경에 제작된 신라 기와나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고, 그 위로는 경질 토기와 큰 항아리 조각 등 9세기 이후의 유물도 출토되었다. 이로써 보아 이 산성은 6세기 중엽 경에 축조되어 9세기 경까지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 안에서도 같은 시기의 기와나 토기 조각이 다량 수습되어, 오랜 시간동안 사람들이 많은 건물들을 건립하고서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기와는 선조무늬線條文, 문살무늬格子文, 복합무늬複合文, 민무늬無文등의 여러 무늬가 다양하게 확인되었는데, 대부분 굵은 선조무늬가 찍힌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외에 비교적 이른 시기로 편년될 수 있는 가는 문살무늬細格子文가 새겨진 황갈색의 암키와 조각도 확인되었다. 토기는 신라 경질토기류, 목에 돌대가 돌려진 경질 큰 항아리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온달산성은 성벽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여 고대 성곽의 축성법 연구에 좋은 자료이다. 성벽의 축조 방법이나 보강 축조 모습, 유물의 출토 현황 등으로 보아, 처음에는 고구려에 의해 축조되었지만, 6세기 중엽경 신라에 의해 다시 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6세기 중엽경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과 함께 신라가 남한강 유역 이북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지방지배를 추구하였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산성으로 평가된다.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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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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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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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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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온달산성

 

 

<2016. 9.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