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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가지산 석남사 승탑

蔥叟 2016. 10. 11. 07:10

울산 가지산 석남사 승탑

 

우리 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은 저마다 불교를 수용하여 토착화시켜 갔다. 백제에서 미륵사를 크게 짓고 신라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운 것에서 볼 수 있듯, 두 나라는 각기 자기 나라가 장차 미륵불이 하생하실 불국토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나라의 힘을 모았다. 마침내 신라에 의해 삼국이 통일되자, 신라 사람들은 신라가 곧 불국토임을 확신하면서 “모든 현상은 하나의 이치로 돌아와야 한다(萬法歸一)”는 화엄종 사상을 통일 왕국의 주도 이념으로 삼아 화엄불국토 건설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조영된 것이 불국사였다. 그러나 불국사 조영을 끝낸 경덕왕대를 정점으로, 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신라 왕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왕실에는 내분이 끊이지 않았고 잦은 왕권다툼 속에서 진골 왕족의 절대적 권위는 빛을 잃어 갔으며 그들의 안정된 통치를 뒷받침하던 화엄사상의 이념적 위치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방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과 경제적 기반을 지닌 호족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제 변화한 신라사회에는 새로운 이념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는 달마선종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선종은 석가모니로부터 가섭, 아난을 거쳐 28대손인 달마대사한테 이어졌다.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 달마선사(달마선사)는 서기 520년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숭산 소림사에 머물면서 선종을 전하니, 제2조 혜가, 3조 승찬, 4조 도신, 5조 홍인으로 이어진다. 5조 홍인(弘忍)에 이르기까지 한 갈래로 이어져 오던 달마의 법맥은 그 다음 대에 이르러 6조 혜능(慧能)의 남종선(南宗禪)과 신수(神樹)의 북종선(北宗禪)으로 갈렸다. 홍인이 자신의 법을 전할 제자를 고르기 위해 시를 적으라 하니 다음과 같이 냈다고 한다. 신수는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과 같나니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티끌과 먼지가 묻지 않게 하라)’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러자 혜능은 菩提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깨달음은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받침대 없네 본래 한 물건도 없나니 어느 곳에 티끌과 먼지가 있으리)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 돈오(頓悟)를 주장하는 남종선은 혜능이 주석하던 광동성 소주 조계산 보림사를 중심으로 남중국 전역으로 전파되어 세력을 떨쳤다. 혜능은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르쳐,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했으며 마조도일은 “다고난 마음이 곧 부처(自心卽佛)”임을 외쳤던 남종선의 골수였다. 이렇게 해서 남쪽에서 선법을 펼친 혜능은 남악회양-마조도일로 이어지는 족보를 만들게 된다.

 

8세기 후반이래 기존의 사회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신라는 여전히 골품제를 바탕으로 한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제아무리 뛰어나도 신분상 최고집권층이 될 수 없었던 육두품 이하 하층 귀족 출신의 신라 사람들 가운데에는 당나라에 유학하여 국내의 신분적 제약을 뛰어넘으려는 사람이 많았다. 속인 가운데는 당나라의 과거인 빈공과에 합격하는 사람도 있었고, 유학승들은 대부분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르쳐, 본연의 성품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敎外別傳直指人心見性成佛)”는 종지(종지)를 내건 선종에 크게 매료되었다.

 

문자(經典)에 의지하지 않고 각자가 자기의 마음을 깨달아 부처가 된다는 선종의 가르침은 교리와 권위를 중시해 온 종래 귀족불교의 틀을 훨씬 벗어난 혁신적인 새로운 사상이었다. 당으로 건너갔던 신라 승려들은 중국 선가, 특히 남종선의 선사(禪師)들로부터 인가(印可, 깨달았음을 스승으로부터 인정받는 것)를 받고 속속 신라로 돌아와 일문(一門)을 개설했다. 그중 가장 먼저 남종선의 심인(心印)을 받고 돌아온 사람이 도의(道儀)선사였다. 그는 속성이 왕씨이고 북한군, 즉 지금의 서울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여려서 출가하여 선덕왕 원년(784)에 사신 김양공 일행을 따라 당으로 건너가 개원사(開元寺)에서 육조 혜능의 법증손인 서당지장(西堂 智藏)에게 인가를 받았다.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여 경전이나 해석하고 염불을 외우는 것보다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부르짖고 다니며 선법을 전하려 했다. 이는 인간의 평등과 인간성을 중시하는 진보적 사상으로서 신라의 왕권 불교에 대단한 반역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교종에만 익숙하던 신라 사회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악마의 말’이니 ‘허황된 소리’니 하며 배척했다. 그러자 도의 선사는 경주를 떠나 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양양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가서 40년 동안 선정을 닦으며 염거(廉居)화상에게 법을 전해 주고 열반에 들었다.

 

염거화상은 설악산 억성사(億聖寺)에 주석하면서 당시 체징(보조선사)에게 법을 전해 주었고 그 체징이 나중에 장흥 가지산 보림사로 옮겨 비로소 가지산문을 개설한 것이다. 보림사의 보조선사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이 때문에 달마가 중국의 1조가 되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선사가 1조, 염거화상이 2조, 우리스님(보조선사)이 3조이다.” 이후 선종은 신라 하대에 지방 호족들의 절대적 후원을 얻었으니 가지산문을 비롯, 실상산문(남원 실상사), 사굴산문(강릉 굴산사), 동리산문(곡성 태안사), 성주산문(보령 성주사), 사자산문(영월 흥녕사), 희양산문(문경 봉암사), 봉림산문(창원 봉림사), 수미산문(해주 광조사)이 바로 그것인데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하는데 9세기 초반부터 10세기 초반에 걸쳐서 모두 개산했다. 이 가운데 강릉 굴산사와 보령 성주사, 창원 봉림사, 해주 광조사 등 네 곳은 폐사되어 터만 남았고 나머지 다섯 본산이 현존하고 있다.

 

가지산은 9세기에 유행하였던 선종(禪宗) 9산 가운데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중심사찰인 전라남도 장흥의 가지산(迦智山)을 일컫는 말이다. 선종이 유행하면서 고승들의 입적은 석가모니의 입멸에 버금가는 대접을 받게 되었고 그들의 사리를 모실 승탑도 만들어졌다. 교종에서는 승탑을 만들지 않았다. 삼국유사에는 경주 안강의 금곡사에 원광법사의 승탑이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원광은 진평왕 때의 인물로써 당시에는 선종이 전래되기 전이었고 남아있는 승탑은 탑에 가까운 석조물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은 고려시대에 잘못 기록된 것이다. 교종에서는 승탑을 만들지 않고 사리도 매장하거나 원효나 염불스님처럼 소상을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제자를 기르지 않았다. 유명한 원효대사도 제자가 있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선종에서는 석가모니의 사리를 불탑에 모셨듯이 누구나 깨달음을 얻으면 부처가 될 수 있으므로 조사(祖師)의 죽음은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즉 스승의 죽음은 깨달음의 경지인 열반을 의미하였다. 스승은 곧 부처와 동격으로 간주하여 승탑(僧塔)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탑을 사찰의 경내 중앙에 배치하였던 것과는 달리 승탑은 경내 바깥 3백보 밖에 건립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승탑은 설악산 진전사터의 도의선사 승탑으로 알려져 있다. 도의의 제자인 염거화상의 승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으며, 보조선사 체징의 승탑인 창성탑은 장흥의 가지산 보림사에 있다. 현재 석남사에 있는 도의선사 것으로 전해지는 승탑은 보조선사 체징의 제자가 석남사를 개창하고 그 산을 가지산이라 이름짓고 보조선사의 승탑과 닮은 승탑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의선사는 석남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이곳에 그의 승탑이 있을 수도 없으며 양식상으로도 기단부가 불탑과 같은 방형인 진전사터의 도의선사 승탑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팔각원당형 승탑의 첫 작품으로 여겨지는 염거화상 승탑은 기단부가 석굴암의 본존불 대좌와 동일한 모습이며 보림사의 보조선사 창성탑에서부터 극락을 상징하는 운문(雲文)이 등장한다. 석남사 승탑은 보조선사 창성탑의 양식을 그대로 빼어 닮은 승탑이다. 따라서 보조선사보다 앞선 시기에 살았던 도의선사 승탑이 될 수는 없다. 도의선사 당시에는 승탑에 대한 정형이 아직 수립되지 않았던 시기이기 때문에 기단부는 불탑의 그것을 그대로 원용하여 방형의 이중기단 구조를 하고 있으며 몸돌만 팔각형을 하고 있는 형태이다. 석남사가 824년 전후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탑의 하층 기단이 매우 높은 신라 하대적 요소를 지닌 것으로 보아 창건 시기도 신라 하대인 것으로 보인다.

 

승탑의 높이는 3.53m이며 석남사의 북쪽 산능선 아래에 있다.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의 모습이다. 이 승탑은 1962년에 해체, 수리되었는데, 이때 가운데받침돌 윗면의 가운데부분에서 네모난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치는 발견되지 않았다. 8각의 아래받침돌은 단면이 8각인 바닥돌 위에 놓였는데, 윗단과 아래단으로 구성되었다. 아래단에는 4면에만 각각 다른 동작을 취하고 있는 사자상이 돋을새김되었고, 곱게 다듬은 윗면에는 1단의 둥근 굄이 새겨져 있다. 단면 8각인 윗단의 아래면에도 아래단의 윗면과 대칭이 되도록 1단의 받침이 조성되었다. 윗단의 옆면 전체에는 권운(卷雲)무늬가 돋을새김되었고, 윗면의 가장자리에는 각진 굄이 얕게 새겨졌다. 윗면의 가운데부분에는 높고 둥근 굄과 낮고 각진 굄을 새겨 가운데받침돌을 받치게 하였다. 가운데받침돌은 단면이 8각이지만, 옆으로 뉘어 놓은 북 모양인 고복형(鼓腹形)이어서 위아래부분은 좁은 편이다. 각 면에는 좌우와 위아래에 안쪽을 향해 낮게 솟은 꽃 모양의 안상(眼象)을 1구씩 오목새김하였으며, 안상 안의 가운데부분에는 꽃잎이 4장인 꽃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윗받침돌에는 각 모서리마다 하나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무늬가 장식되었는데, 연꽃무늬 사이에는또 하나의 꽃잎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밑면에는 1단의 각진 받침이 있고, 윗부분은 덮개돌 모양이며,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기 위해 마련한 각진 8각의 1단 굄이 있다.

 

단면이 8각인 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이 얕게 조각되었고, 위아래에는 마치 가장자리를 따라 테두리를 짜 놓은 듯 선을 돌렸다. 앞면과 뒷면은 다시 길고 네모난 테두리를 문비(門扉)처럼 오목새김하였는데, 앞면에만 자물쇠를 돋을새김하였을 뿐, 뒷면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앞면 문비의 좌우 각 면에는 서 있는 신장상(神將像)이 배치되어 있다. 지붕돌은 추녀가 짧은 편으로, 밑면에는 2단의 각진 받침이 조각되었고, 추녀 끝부분까지 면마다 각진 서까래가 새겨져 있다. 윗면인 낙수면은 경사가 거의 없이 평박(平薄)한데, 8면의 합각(合角)마다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을 새겼고, 그 사이는 기왓골을 표현하였다. 우동의 전각(轉角)에는 작은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에는 앙화(仰花), 보개(寶蓋), 보주(寶珠)가 놓여 있다.

 

탑의 상륜부의 앙화에는 ‘가릉빈가’가 새겨져 있다. 가릉빈가는 불교에서 말하는 상상의 새인데 극락조라고도 하는데 머리는 사람의 형태이나 몸은 새의 모양(人頭鳥身)을 하고 있다. 범어로 카라빈카(Kalavinka)라고 하는 이 상상의 새는 히말라야에 잇는 설산(雪山)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자태는 물론이고 소리 또한 묘하고 아름다워 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 또는 옥조(玉鳥)라고 한다. 극락정토에 사는 새라고 하여 극락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가릉빈가는 어떤 상황이나 장소를 미화하고 이상화하려는 방법으로 흔히 사용된다. 불교경전에 의하면 고대 중인도 교살라국 사위성(舍衛城) 남쪽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부처님께 공양하는 날에 가릉빈가가 내려와 춤을 추었고, 묘음천(妙音天)이 가릉빈무(迦陵頻舞)라고 하는 무곡(舞曲)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불전이나 부도를 장식하는 소재로 가릉빈가가 자리잡게 되었다. 가릉빈가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다리와 몸체와 날개는 새의 형상이고, 얼굴고 팔은 사람의 모습이다. 몸체는 깃털로 덮혀 있으며, 깃털이 달린 화관을 쓴 경우도 있고, 때에 따라 악기를 연주하기도 한다.

 

▲승탑

 

▲승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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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