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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이형석탑 - 경주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옥개석

蔥叟 2016. 8. 5. 17:15

제3의 이형석탑 - 경주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옥개석

 

천관사터는 도당산과 오릉 사이에 위치해 있다. 천관사터에 팔각삼층석탑이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불국사 다보탑 같은 이형탑이 천관사에 있었던 것이다. 사적 340호 천관사터에는 방형 기단부와 팔각 탑신석으로 구성된 석탑이 남아 있으나 상층 부재가 없어 원형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일제강점기 때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가 작성한 <고고자료>를 토대로 옥개받침 부분에 연화문이 새겨진 팔각 옥개석을 지닌 석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를 토대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놓인 팔각연화문옥개석이 천관사터에 남아 있던 것이라는 점도 발견했다.

 

팔각형 옥개석을 보면 상단에는 2단의 탑신 괴임이 있고, 옥개받침부에는 3중으로 연꽃이 조각돼 있고 우메하라 고고자료에 기록된 옥개석편과 유사한 점으로 보아 천관사지에서 반출된 것으로 보인다. 팔각의 옥개석 하단에 3단의 연화문이 옥개받침으로 새겨진 예는 현재로서는 천관사지 석탑이 유일하다. 천관사지 석탑의 추정복원도를 작성함으로써 그동안 논란 속에 의문으로 남아 있던 석탑 원형 추정의 단서를 제공할 수 있었다. 경주지역 이형석탑의 새로운 발견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옥개석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옥개석

 

천관과 김유신장군의 슬픈 사랑으로 하여 세워진 천관사는 오릉의 동편 도당산 서편의 논 가운데 있다. 김유신 장군의 고택으로 전하는 재매정과는 문천을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다. 지금은 페탑의 조각을 비롯한 몇 개의 석물만이 남아있어 천관사의 모습을 그려보기가 매우 어렵다. 삼국유사에는 전하지 않지만 동국여지승람과 동경잡기에는 천관에 관한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김유신이 젊었을 때 어머니이신 만명부인(萬明夫人)은 날마다 엄한 가르침을 교유(交遊)함에 잊지 말도록 하였다. 하루는 천관(天官)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만명부인은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다. 주야로 너의 자라남을 바라보고 있다. 공명을 세워 군친(君親)의 영광이 되어야 하거늘 지금 너는 술을 파는 아이와 함께 음방(婬房)에서 유희를 즐기며 술자리를 벌이고 있는구나” 하면서 울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김유신은 즉시 어머니 앞에서 맹세하기를 “다시는 그 집앞 문을 지나지 않겠다” 고 하였다. 하루는 피로에 지쳐 술을 마신 후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김유신이 탄 말은 옛길을 따라서 잘못하여 창가(倡家)에 이르고 말았다. 김유신은 한편으로는 기쁘고 또 한 편으로는 원망스러웠다. 천관이 눈물을 흘리면서 나와 맞이하였다. 그러나 공은 이미 깨달은 바가 있어 타고 온 말을 베고 안장을 버리고 되돌아 왔다. 천관이 원망하는 노래를 한곡 지었는데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경주에 천관사(天官寺)가 있는데 즉 그 집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옥개석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옥개석

 

천관사는 왕실과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김경신(金敬信․元聖王)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꿈을 꾸었는데 그 꿈도 천관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인도의 말라족이 대관식(戴冠式)을 하던 절도 천관사였다고 한다.

 

이찬(伊湌)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수석 재상으로 있을 때에 왕은 각간의 지위로 그의 차석의 자리에 있었다. 왕은 꿈에 머리에 썼던 두건을 벗고 흰 갓을 쓰고 손에 12현금(絃琴)을 잡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을 깨어 사람을 시켜서 점을 쳤더니 점쟁이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쫓겨날 조짐이요, 12현금을 잡은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들어갈 조짐이외다.” 하였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이때에 아찬 여삼(餘三)이 와서 배알하겠다고 연락하였으나 왕은 병으로 나가지 못하겠다고 사양하였다. 두 번째 연락하여 말하기를, “꼭 한 번만 뵙기를 바라나이다”고 하여 왕이 이를 승낙하였다. 아찬이 말하기를, “공께서 지금 기(忌)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왕이 꿈을 점친 사연을 죄다 이야기하였더니 아찬이 절을 하고 말하기를, “이 꿈은 아주 길한 꿈이외다. 공께서 왕위에 올라가도 저를 버리시지 않으신다면 공을 위하여 해몽을 하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곧 좌우를 물리치고서 해몽을 청하니 그가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자기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썼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12현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궐에 들어갈 조짐이외다”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 윗자리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니 아찬이 말하기를, “청컨대 비밀히 북천(北川)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왕은 이대로 하였다. 얼마 안 가서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주원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고 그를 대궐로 맞아들이려 하였던 바 그의 집이 개천 북쪽에 있었는데 졸지에 냇물이 불어 건널 수가 없었다. 왕이 먼저 대궐로 들어가 즉위하니 주원의 도당들도 모두 와서 여기에 붙어 새로 등극한 임금에게 배하(拜賀)하였다. 이가 원성대왕이 되었으니 이름은 경신(敬信)이다. 대체로 좋은 꿈을 꾼 것이 들어맞은 셈이다.

 

<삼국유사 원성대왕(元聖大王)조>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옥개석

 

▲천관사터 팔각삼층석탑 추정복원도

 

 

 

<2016. 8.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