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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적성비

蔥叟 2016. 6. 10. 07:55

단양 적성비

 

적성비가 발견된 이 지역은 남쪽에서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직전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이며, 부근에는 고구려 장군 온달의 전설이 전해오는 온달산성이 있다. 자연석 화강암의 표면을 다듬어 글자를 새겼으며,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관계로 마멸이 적어 자획이 또렷한 편이다. 적성비의 윗부분은 파손되었으며, 21행에 430자 가량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비석이 발견된 직후 행해진 주변 일대의 발굴조사를 통해 건물터가 밝혀졌고, 기와·토기 편을 비롯하여 몇 개의 비편이 더 발견됨으로써 현재는 모두 305자를 읽을 수 있고, 정밀한 연구에 의하여 비편 가운데 일부는 본문에 연결시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비문의 글씨체는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며, 문장은 한문투와 함께 신라 고유의 문장법이 혼용되어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비문은 크게 처음의 연월일을 기록한 부분과 본문, 그리고 비를 세우는 데 관계한 사람들을 기록한 3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연월일을 기록한 부분은 파손되어 있다.

 

건립연대는 진흥왕 때가 틀림없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한 시기 비정에 가서는 적성지방의 신라영토 편입시기를 검토하여 550(진흥왕11)에서 566(진흥왕16)사이를 주장하는 학자들과 비문의 내용상 등장하는 인물 등의 이름이나 관등(官等)을 가지고 진흥왕 14년 이전일 것으로 추측하는 두 가지의 설이 있다. 어느 경우나 그 시기의 차는 몇 년차에 불과하므로 대략 550년 이후의 3~4년간에 이 비가 만들어진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적성비는 신라의 지방통치제도관등제도신영토의 지배방식신라의 율령제도 등 다른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사실들이 내포되어 있어 신라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금석문 자료로 인정되고 있다. 하나의 예로써 적성비를 통해 지금까지의 신라가 보여 왔던 소극적인 정책에서 선회하여 적극적인 대 고구려 백제의 정책을 강하게 추진할 것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도출해 볼 수 있다. 또한 적성비에는 신라의 관직 체계의 일단이 드러나 있는데 이는 신라의 율령제도의 확정시기를 이전의 견해보다 더욱 앞당기는 근거가 되어 520(법흥왕 7)년의 율령반포 기사를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가 되고 있다.

 

윗부분이 없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에는 총 22행에 430자 가량을 새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중 읽을 수 있는 글자는 비에 남아있는 288자와 발굴당시 수습한 비편에 새겨진22자를 합하여 총 309자이다. 글자의 크기는 약 2cm내외로 상당히 얕게 새겨져 있으며 비문의 글씨체는 예서의 여운이 많이 남아있는 해서체이다. 한문과 함께 신라고유의 이두문이 혼용 되어 쓰였다.

 

비문은 내용으로 보아 크게 3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부분은 11자부터 612자까지로 국왕이 대중등(大衆等), 고두림성재군주(高頭林城在軍州), 추문촌(鄒文村)물사벌성당주(勿思伐城幢主) 등에게 교시를 내린다는 내용이다. 이 중 고두림(高頭林)은 인명으로 파악되기도 하였으나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비편을 통하여 지명으로 밝혀졌다. 교시를 받은 인물은 모두 왕경인(王京人)으로 총 9명이다. 이들을 국왕의 명령을 받고 적성 경영에 참여한 지도층으로 파악하는 견해와 국왕을 대신한 것뿐이지 적성공략내지 경영과 무관한 인물이라고 파악하는 견해가 대립되어있지만 이들 대부분은 진흥왕의 북진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진흥왕대 신라의 정치체제는 급속히 군사화되고 있었으며 특히 9명 중 최고위 인물인 이사부(異斯夫)는 병부령으로 정치 군사의 실권자로 진흥왕 초기 북진정책을 주도하였던 인물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모두 적성의 공략과 경영에 직간접적으로 간여하였던 인물들로 보인다.

 

둘째는 613자부터 시작되나 끝부분은 글자가 탈락되어 정확하지 않다. 대체로 1720자나 18행의 탈락된 부분에서 나누어질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으로 보아 다시 두 단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단락은 적성 진출에 공을 세우고 죽은 야이차(也尒次)의 유가족 및 그와 관련된 적성지방인들에게 포상하는 내용이며 둘째 단락은 야이차와 같이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교시가 담겨있다.

 

셋째는 18행부터 끝까지로 비석을 세우는데 관련된 사람들의 인명을 적은 부분이다. 여기에는 모두 6명의 인물이 기록되어있는데 지방관인 도사(道使) 2인과 비문을 작성한 서인(書人) 1인은 왕경인이고 나머지 사인(使人)3명은 지방민이다. 이들은 모두 적성 경영의 추진 층으로 파악되고 있으나 실제 비석을 세우는데 직접 간여한 것은 서인(書人)과 비금개리촌도사(比今皆里村道使)등 왕경인이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비문 시작부분에 간지가 기록되어 있었지만 발견당시 이미 탈락되어 정확한 건립시기를 추정하기 어렵다. 따라서 건립연대는 비문내용을 <삼국사기>의 기록과 대비하여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크게 세 가지로 견해가 나누어지고 있다첫째는 적성지방이 신라에 편입된 시기를 중시하는 것이다. 55110군을 고구려로부터 빼앗았을 때 적성지방도 신라에 편입되었다고 보아 비석의 건립시기를 551년 이후로 추정하는 것이다두 번째는 비석에 기록된 인물의 관등을 통해서 건립연대를 추정하는 것이다. 비문에 비차부(比次夫)는 아간(阿干)으로 기록되어있지만 삼국사기』「거칠부전에는 이보다 높은 대아간(大阿干)으로 되어있다. 또한 대중등(大衆等)들 중에 이름이 지워진 □□부지(夫智)를 거칠부로 추정하는데 비문에 거칠부의 관등은 대아간(大阿干)으로 기록되어있다. 하지만삼국사기에 거칠부는 545년에 대아간(大阿干)에서 파진찬으로 승진했다. 따라서 거칠부의 관등으로 보아 건립연대는 545년 이전이 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앞의 두 견해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550년경을 건립연대로 보는 것이다. 첫 번째는 먼저 비차부의 관등이 문제가 된다. 또한삼국사기55110군 공략의 주도자가 거칠부이지만 비문에는 적성공략주도자가 이사부로 기록되었다는 것도 문제이다. 두 번째 견해에서는 □□부지를 거칠부로 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때문에 거칠부의 관등에 맞추어 건립시기를 545년 이전으로 보기가 어렵다. 비문과 삼국사기를 종합하면 신라는 10군 공략이전에 이사부의 주도하에 적성지역에 진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건립연대는 551년보다 빠른 시기가 되고 대체로 550년경에 비석이 건립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가 정확한 것은 아니고 550년보다 몇 년 더 빠를 수도 있지만 앞으로 이를 보완해줄 수 있는 자료가 출현할 때까지 막연하나마 건립연대는 하한선을 550년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신라는 고구려의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백제의 근초고왕과 더불어 정복 군주로서 유명한 진흥왕에 이르러 전성기를 맞이한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만들고 불교를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이를 바탕으로 북으로는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까지 올라갔으며 남으로는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까지 진출한다. 이러한 진흥왕의 업적은 단양 적성비와 황초령비, 마운령비, 북한산비, 창녕비의 4개의 순수비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비석은 왕명을 받고 출정한 이사부를 비롯한 여러 장군들이 적성을 공략하여 차지하고 이 작전을 도와 공을 세웠던 적성출신 야이차와 그와 관계된 적성민을 포상하며 적성지방민을 위무할 목적으로 세운 비이다. 북방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방민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왕이 직접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순수비"와 구분된다. 또한 적성지역을 새로이 영토로 편입한 후 세워졌기 때문에 "척경비"성격도 일부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적성민에 대한 포상이 비문의 주체가 되고 있어서 척경비의 목적과 다소 거리가 있다. 따라서 "순수""척경"이란 용어를 빼고 시대를 밝히기 위한 신라를 넣어서 "단양신라적성비"라 명하게 되었다.


▲적성비각


▲적성비각


▲적성비각


▲적성비각


▲적성비각


▲적성비


▲적성비

▲적성비


▲적성비


▲적성비


▲적성비


▲적성비

 

 

 

<2016. 5.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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