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청룡사터 보각국사정혜원융탑
이 부도는 고려 말의 고승 보각국사(普覺國師) 혼수(混脩)의 승탑이다. 승탑이란 승려의 사리를 안치한 건조물로,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초기에 이르기까지 부도의 전형적인 형태인 8각원당형의 구조를 갖추고 있는데 이후로는 종모양이 많이 만들어졌다. 국사는 73세이던 조선 태조 1년(1392년)에 청룡사에 들어와 입적하였다. 이에 태조는 왕명을 내려 승탑을도를 짓게 하여 태조 3년(1394년)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보각(普覺)’이라는 시호와 함께 ‘정혜원융(定慧圓融)’이라는 탑호(塔號)를 하사하였다. 또한 청룡사에 대사찰을 조영하도록 했다. 승탑 바로 앞에는 상석을 마련하였으며, 그 앞에 석등을 두었다. 승탑 뒤편으로는 탑비가 있다. 이처럼 석등과 승탑, 탑비를 일렬로 놓는 것은 조선시대에 많이 사용되었던 배치방식이다. 승탑은 장대석을 한 단 쌓아 만든 대지 위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앞의 한 단 낮은 곳에 석등이 있다. 장대석의 배열로 보아 기단은 측면으로도 연장되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측면의 기단은 남아있지 않다.
승탑은 전체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외형적 특징은 몸돌과 기단부 중간돌을 부풀려 놓은 모습이고 지붕돌의 합각마루에는 특이하게 용머리와 봉황이 수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아래에 지대석을 두었으며, 기단은 하대석과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대석 위에 탑신석을 올리고 옥개석으로 덮었으며, 옥개 위에는 상륜을 두어 마무리하였다. 한 장의 판석으로 이루어진 지대석은 운두가 높은 편이며, 상면에 팔각형 홈을 파서 하대석을 끼워 넣었다. 하대석은 상하로 2등분을 한 후 아래 부분에는 아무런 무늬를 베풀지 않았고, 윗부분에는 복련을 새겼다. 연잎은 모서리에 하나, 각 면에 하나씩 모두 16개이며, 그 사이마다 간엽(間葉)을 새겼다. 각 연잎은 2중으로 새겼으며, 다시 그 속에 무늬를 넣었다. 연잎의 조각은 비교적 고부조(高浮彫)로 양감이 풍부하고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상대석은 앙련을 새겼는데 하대석과 동일한 조각을 베풀어서 중대석을 사이에 두고 상하가 완전한 대칭을 이룬다. 하대석 상면에는 한 단의 쇠시리를 두어 중대석을 받치기 위한 고임을 이루도록 하였는데, 상대석 아래 면도 마찬가지이다. 중대석은 높이가 낮은 편이며 북과 같이 배가 부르도록 하여 안정된 조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팔각의 몸돌에는 사천왕을 새긴 것으로 보이며, 각 모서리 기둥은 엔터시스로 이루어져 있으며, 표현에는 반룡이 기어오르고 있어 아름다움과 조각의 정교함이 극치를 이루고 있다. 지대석과 몸돌 윗면에는 사리공이 있어 보각국사의 사리 및 옥촛대, 금망아지, 금잔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일제강점기에 도난당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승탑은 평면이 팔각으로 기본적인 형태가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했던 승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석종형(石鐘形) 승탑이 유행했던 고려 말 조선 초에 고식(古式)을 따라 만든 매우 드문 예이다. 그러나 세부적인 조각수법에서는 신라 말 고려 초와는 전혀 다른 양식을 보이고 있다. 고부조로 양감이 풍부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조각 수법, 목조건축의 모습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했던 것과 많은 조각 장식을 베푼 점 등도 고려 말 조선 초의 승탑을 비롯한 석조물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이 승탑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전반적 형태 및 세부조각 등이 조선초기 석조미술의 한 표본임을 보이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받고 있다.
▲보각국사정혜원융탑
▲보각국사정혜원융탑
▲하대복련
▲하대복련
▲중대 사자상
▲중대 사자상
▲중대 사자상
▲중대 사자상
▲중대 사자상
▲중대 사자상
▲중대 사자상
▲중대 사자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사천왕상
<2015. 11.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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