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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간월사터 금당터

蔥叟 2016. 2. 2. 08:01

울산 간월사터 금당터

 

'간월사기'에 보면 신라 진덕여왕(647~654) 때 고승 자장(慈藏)이 창건하였으며 예전에는 그 뒤 조선시대인 1634(인조 12)에 명언(明彦)이 다시 지었으나 1836(헌종 2) 큰 흉작이 들어 다시 폐사되었다고 한다. 18∼19세기에 만들어진 '언양현호적대장'에 수록된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는 사찰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750년 '해동지도'1800년 이전의 것인 '광여도', 1834년 '청구도'에 간월사가 확인된다.

 

간월사(澗月寺)의 창건 시기에 대하여 수오 서석린(1710~1765)이 지은 '수오선생문집(睡聱先生文集)'의  『관월사기(觀月寺記)』에 의하면 자장율사가 진덕여왕 때에 지은 절이라 되어 있다. 이는 조선 숙종 때인 1759년에 간행된 『언양읍지』에 근거한 것인데 언양읍지에는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로부터 돌아와서 간월산에 있으면서 통도사보다 먼저 지은 절이라고 하였다.

 

○新羅善德女王五年丙申 唐貞觀十五 慈藏禪師自終南雲際寺 先住乎此 甁建此寺 再至于通度

신라 선덕여왕 5년 병신년, 당 정관 15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종남산 운제사에서 돌아와 이곳에 먼저 주석하면서 이 절을 창건하고 다시 통도사에까지 이르렀다.

 

<언양읍지>

 

그러나 자장율사가 선덕여왕 5년에 당나라에 들어가 수학하여 8년뒤인 선덕영왕 12년에 귀국하였으므로 이 기록 또한 신빙성이 약하다. 또한 언양읍지에의 경우에는 당나라 유학 전에 창건설화에 대해 자장이 통도사에 앞서 간월산에 머물면서 간월사를 창건한 것으로 되어있어 간월사기와는 상반된 기록을 전하고 있다. 산월산과 신불산 자락에 구십구 암자가 있었을 만큼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으나, 차츰 퇴락하여 임진왜란 때 왜병들에 의해 불타 폐사가 되었다. 이후 인조 12년(1635)에 明彦이 다시 지었던 것을 헌종 병신년(1836)에 큰 흉작이 들어 완전히 폐사되었다. 18∼19세기에 만들어진 '언양현호적대장'에 수록된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는 사찰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1750년 '해동지도'1800년 이전의 것인 '광여도', 1834년 '청구도'에 간월사가 확인된다. 이후 지방의 뜻있는 인사들이 힘을 모아 암자를 세우고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였다.

 

동아대학교박물관이 발굴 조사함에 따라 금당터와 남·북 삼층석탑, 중문터, 동문터, 강당터를 비롯한 각종 건물지가 확인되어 대체적인 가람배치가 밝혀졌다이 절터는 간월산 중턱에 위치한 산지가람이며, 동향으로 되어 있는 금당터로부터 석등, 석탑, 중문터, 동문터로 연결되는 계단식 구조를 가지고 있다. 현재 금당지 등의 건물터와 축대, 주초석, 장대석 등이 남아 있다. 1984년의 발굴조사로 금당지는 가로 13.72m, 세로 10.72m 크기의 사각형으로 정면 3, 측면 3칸 규모임이 확인되었다.

 

현재 간월사터에서 볼 수 있는 유적과 유물로는 금당터를 비롯하여 남북으로 세워진 쌍탑과 광배와 대좌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는데 이들 유물과 유적 그리고 석탑의 조성수법 등을 통해서 볼 때 간월사는 8세기 중엽이후 내지 9세기초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동향한 금당터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에 가까운 데 금당터, 석등, 석탑, 중문터, 동문터로 연결된 계단식 구조로 배치되어 있다. 금당터의 초석과 초석 사이에 장대석이 놓인 것은 대체로 불국사 창건 후에 나타나는 양식인 데 장항리 절터, 간월사터, 합천 영암사터, 그리고 포항 법광사터 등의 금당터에서 이와 같은 유구를 볼 수 있다.

 

간월사에는 날아간 학에 관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양산 통도사에서 영축산을 넘어 언양 석남사로 가는 길에 간월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 이 절 스님들은 객승과 나그네가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고 만약 객승과 나그네가 찾아오면 실컷 푸대접을 해서 보냈다. 자신들은 넉넉하게 살았지만 재물을 더 모아야 하는데 객승과 나그네가 찾아오면 식량이나 노잣돈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재물을 모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느날 행색이 초라한 객승이 찾아와서 하룻밤 유숙을 청하였고 아침에 길을 떠나면서 주지스님에게 "이 절 스님들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간월사의 스님들은 객승에게 무슨 대단한 재주가 있느냐 하면서 비웃으며 "다른 소원은 없고 제발 스님처럼 시시껄렁한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소."라고 대답하였다. 객승은 "그것이 소원이라면 일주문 앞에 있는 넓은 바위를 깨뜨리시오. 그러면 객승이 일체 찾아오지 않을 것이오." 그 말을 들은 간월사의 스님들이 일주문 앞의 바위를 깨뜨리는 순간 두 마리의 학이 푸르른 허공 위로 날아올라서 한 마리는 통도사의 선자바위 속으로, 다른 한 마리는 범어사의 두쥐재 속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 뒤 간월사는 점점 퇴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간월사터 전경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금당터 장대석

 

▲금당터 초석과 장대석

 

▲금당터 초석과 장대석

 

▲금당터 초석과 장대석

 

 

 

<2015. 1. 30>